09. 조별과제의 친절한 여자

손해를 감수하고 협력하던 선의가 있었다

by 최초록별

학교를 너무 열심히 다녔나 보다. 교수님이 다음 학기에 ‘자신의 특별 수업이 열리니 꼭 수강하라’는 말을 하려고 나를 교수실에까지 불렀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 산 게 분명했다. 내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아시는지 모르는지, 아는데 못 본 척하시는 건지. 교수님은 오직 ‘그 수업이 미래 진로에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수업에는 자신이 인정한 학생들만 특별 수강할 수 있게 할 것이다’는 말을 한참 설명하셨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교수님, 그 말은 강의가 소규모고, 엄청난 3~4학년들이 많아서, 그사이에 치인 저는 제대로 된 학점을 못 가져간다는 뜻이잖아요.’


아직 뻔히 보이는 악수를 선택할 정도로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싫어요’를 답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내 마음과 다르게 입은 솔직하지 못해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차마 학부에서 제일 무섭고 강력하다고 소문난 교수님을 등질 용기가 없었다. 결국 1학년 때 교수님의 눈에 찍힌 나는 꼼짝없이 다음 학기에 열릴 고학년 수업을 듣게 됐다. 그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도 찍혔기 때문에 얌전히 함께 수강 신청했다.


첫 번째 수업 날이었다. 1학기 동안 팀 프로젝트로만 진행될 강의인 만큼 첫날은 바로 조 편성이 진행됐다. 조 편성은 자율이었다. 한 조의 최대 인원은 4명.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으니 함께 할 나머지 2명을 찾아야 했다. 나에겐 모두 처음 보는 학생이었다. 서로 긴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이 첫인상과 인사 몇 마디로 조를 짜야 했다. 한 학기의 운명을 이렇게 짜야 한다니… 랜덤이 아니라면 교수님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기서 인생 최악의 실수를 해버리고 만다. 나는 그 당시 제정신이 아닌 문제로, 우리 팀에 여자 팀원을 넣으면 남자친구가 새로운 썸을 타버릴까 두려워지고 만 것이다…! 나도 조별과제로 인해 사귀게 되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거 같았다. 그런 일은 남자친구가 문제인 거지 한 학기를 거는 조편성에서 고려할 문제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그 땐 뭘 몰라도 한참 몰랐다. 내 눈에는 여자 선배들이 지나치게 이뻤다. 거기에 똑똑하기까지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벌써 나도 반할 것 같았다. 걱정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선배의 친구 선배 팀이나 복수전공을 하는 다른 여자 선배 페어에게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처음 보는 남자 선배 페어와 조를 이루기로 했다. 그 선배들은 내게 함께해줘서 고맙다며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사이코패스의 웃음이었다는 사실은 정확히 2주 뒤에 깨달았다. 전무후무한 역대급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은 기대 수준이 매우 높으시고, 반대로 가이드라인은 없다시피 한 분이라, 수업 난도가 매우 높았다. 매 수업에서 던져지는 과제량이 힘든 수준이었다. 모두가 허겁지겁 따라갔다. 나 역시 듣고 있는 수업 자체에 회의가 생길 무렵, 남자친구가 자신만 4학년 마지막 학기 찬스로 과목을 드랍했다. 이런 나쁜 놈. 헤어졌다. 교수님 강의를 수강하기 전, ‘우리 같은 조 해?’라는 내 말에 그가 ‘그럼 다른 조 하려고 그랬어?’ 하며 웃었던 게 기억났다. 돌이켜보니 사이코 웃음이었다. ‘아냐^^ 같은 조 해야지’라고 말했던 과거의 내 자신이 후회됐다. 사랑에 속았던 게 패착이었다. 3명 언니선배 조에 혼자 쏙 껴서 했었어야 했는데. 그 언니네 조는 정말 잘했다.


조별 과제는 3명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1명이었다. 나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마감 시간을 맞추러 밤을 새우고, 라꾸라꾸에서 쪽잠을 잘 때, 나머지 팀원들은 ‘(집이 너무 커서) 와이파이가 안 된다’든가, ‘(고학년이라) 너무 피곤해서 잤다’던가, ‘(학교에서 무료로 주는) 오피스 프로그램이 없다’든가, ‘(마침 방금)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갔다’든가, ‘(갑자기) 깁스를 고치러 갔다’든가 같은 말도 안 되는 다양한 이유로 조별 과제를 피했다. 세상 많은 사건·사고가 그 두 사람에게만 일어났다. 재앙의 피뢰침이냐고 진지하게 물어봤다.


그게 계속되다 보니 교수님도 대놓고 선배들한테 면박을 줬지만, 그럴수록 선배들은 강의실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D0도 괜찮다고 말하시더니… 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D0가 괜찮으신 거였군요.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깨닫게 됐다. 어쨌든 나는 혼자가 되었다. 한 학기 동안 거의 졸작과 비슷한 대형 프로젝트를 끝내야 하는 과목에 혼자 개인프로젝트로 돌리고 있자니 힘에 부쳤다. 그냥 이 과목 버리고 교수님을 안 볼까 싶었다.


그날도 중간보고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내려오는데 선배들이 불렀다. 추가 인원 없이 처음 3명으로 팀을 꾸린 언니네 조였다.


“초록아, 나머지 팀원은 안 왔어?”


“네. 마지막 병원이라고 한 이후로 연락 안 돼요.”


“헉. 그럼 오늘 것도 혼자 한 거야?”


“네… 뭐 매번 그렇죠.”


“미쳤네… 연락은 더 안 해봤고?”


“저 차단했던데요. 프로필 안 보이면 차단 당한 거 맞죠?”


내가 핸드폰을 보여주며 한숨을 쉬자, 언니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팀이 흔들거린다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 언니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항상 연락 달라고 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 알 수 없던 나는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과제 주제부터 팀 내에서 정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팀의 주제가 완전히 달랐다. 내 과제에 관해 묻는다는 것은 언니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언니들은 그 주 자율 조별 시간 전부를 나를 위해 써줬다. 자신들의 과제물 중간 파일을 열어 어떤 수식을 걸어서 나온 결괏값인지, 어떤 프로세스로 도출하게 되었는지 직접 자세히 설명해줬다. 내 과제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중점으로 설명해줬다. 팀 내에서 공유하던 문서도 전해줬다. 다른 팀의 언니들도 내 조별 과제에서 보충하면 좋을 점들을 자세히 알려줬다. 소규모 강의지만 인원수가 아슬아슬하게 넘어 상대평가인 바람에 A0 이상은 겨우 1팀밖에 못 가져가는데도 그랬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모두가 도와줬다.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아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수업 시간마다 우리 팀 대신 다른 팀원들이 나와 자리에 같이 앉아주고, 나에게 안부를 물어주고, 간식을 나눠주고, 함께 고민해주고, 설명해주고, 피드백해줬다. 그 모든 도움으로 포기하지 않고 최종과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최종 과목 점수는 B+이었다. 다른 과목이 조금씩 희생됐지만, 이 과목을 끝냈다는 것에서 깊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적은 자리만을 놓고, 협력과 기대를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도움을 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협력이 곧바로 자기 손해로 이어지는데도 오직 마음을 따라 그렇게 한다.


<도덕경제학>의 저자 새뮤얼 보울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인센티브를 받지 않더라도 타인을 도우려는 성향이 있으며, 인간 본성의 이타심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는 존재'라고 한다.


불이익이 있어서 돕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불이익이 예상되는데도 기꺼이 도와주려 했던 언니들. 내게 도움을 요청받지 않았어도 기꺼이 선의를 보여주던 언니들은 가장 사람다운 존재였구나 생각하게 된다. 돕고자 했던 감정을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대로 배려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강한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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