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술자리의 친절한 여자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다정이었다

by 최초록별

대학생들이 입을 모아 꿈도 꾸지 말라는 ‘대학교의 유정 선배’.


내 여자를 배려하고, 실수는 여유롭고 센스 있게 넘겨주고, 위험 상황에서는 상대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그야말로 다정함의 교과서. 바로 그 <치즈인더트랩>의 ‘유정 선배’가 Y의 별명이었다.


Y로 시작하는 성씨가 같다고 Y가 유정 선배로 불린 건 아니다. 정말 행동이 유정과 닮아 얻은 별명이었다. 평소에도 퍽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그 애가 특히 술자리에서 보여주던 매너는 만화를 초월하는 다정함이 있었다. 친구가 주변인들에게 유정 선배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몇 개의 사건이 유효했다. 내가 주변인에게 들었던 Y의 일화를 공개한다.



1. 택시 귀가 일화


Y가 동기들과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꽤 오랜 시간 타지에서 함께 했던 동기들이라 회포를 풀 겸 달린다는 게 모두 자신의 주량을 넘겨 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끝까지 취해서 흐지부지 파해진 자리에, Y도 집으로 돌아가려 택시를 잡았다. 택시 하나를 잡아 같은 방향에 사는 언니와 함께 탔다. 그렇게 집에 가던 도중, 갑자기 언니가 안색이 파래진 얼굴로 Y를 불렀다.


“Y야... 나 아무래도 택시에서 내려야 할 거 같애...”


“네?”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먼 거리였다. 이유를 묻자 언니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토... 토할 거 같아...”


언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택시에 토한다면 일이 커지고, 택시에서 내리자니 그것도 번거로워지는 일이었다. Y는 택시를 세우지도, 언니의 토를 막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행동을 취했다.


“언니 괜찮아요. 그냥 제 가방에 토하세요.”


끝이었다. 핸드백을 아낌없이 열어준 덕에 언니는 그 자리에서 가방에 모든 것을 쏟아냈고, 빠르게 상황은 해결됐다. 핸드백에는 필기구며 파우치며 다 있었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 물어보니까, Y는 본인도 취했을 때라 정신이 없어 그럴 수 있었다 답했다.


“택시에서 내리면 다음 택시가 잘 잡힐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언니 집에 늦게 들어가면 더 걱정되고.”


핸드백 안에 내용물 정도는 닦으면 되니 그저 그렇게 했다는 깔끔한 답이었다.



2. 도보 귀가 일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Y가 자신의 중학교 친구를 부른 날이었다. 친구는 이렇게 본격적이고 격 없는 술자리는 처음이라며 최고로 재밌게 놀아보겠다 웃었다. 자신의 주량을 모른다던 그 친구는 몇 시간 뒤, 생애 최초로 완전히 취하고 말았다. 자신이 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까지 완벽한 만취 상태였다.


우리는 부축하려 했으나, 친구는 연신 손을 저으며 자신이 취하지 않았음을 어필했다. 멀쩡함을 증명하겠다며 오늘은 집까지 걸어가 보이겠다고 했다. 다른 친구가 걱정되는 얼굴로 물었다. 집이 어딘데? 으응, A역 근처야.


...도보로 50분 넘는 거리잖아!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도 밤 11시였다.


“그 거리를 걸어간다고? 버스나 택시 타자. 늦은 밤이라 너무 위험해.”


“아냐... 난 걸어야 해... 흑...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해...”


친구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걷다가 걷다가 걷다 보면 바라던 집이 친구를 기다린다고 완전히 믿는 듯했다. 잘 달래보아 버스 정류장으로 옮기려 했으나 완전히 불가능했다. 택시 정류장, 버스 정류장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걸 어쩌나. 콜택시를 부른 뒤 택시에 구겨 넣어볼까 싶던 차에 Y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같이 걸어가자.”


친구들이 Y를 말렸으나, Y는 완고했다. 이미 많이 취한 친구를 혼자 걸어보라고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하고, 둘이 걷는 건 그나마 위험하지 않으니 같이 걸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야, 너도 여자야! 한 친구가 소리쳤다. Y는 끄덕였다. 다른 친구도 고함쳤다. 너 그거 진짜 유정병이야! 그 말이 웃기는지 Y는 킬킬대기만 했다. 자신은 최대한 큰 길로 걸을 것이며, 걷다가 친구가 괜찮아지면 바로 택시를 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Y는 그런 식으로 우리를 안심시켜놓고... 그날 50분을 걸어 친구네 집 앞까지 걸어갔다.



3. 어부바 귀가 일화


그날은 나와 Y를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동네 단골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렇다. 또 취했다. 모든 유정 서사는 사람이 취해야 일어난다. 아무튼 우리는 꽤나 술을 잘 마셨고, 집이 근처라 우리를 제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주종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고, 맥주를 마시다 소주로, 소주를 먹다가 하이볼로, 하이볼을 먹다가 바카디 샷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모두가 머리끝까지 취했다. 모두가 정신은 술집에 둔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Y는 나랑 집에 가는 길이 엇비슷했다. Y랑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중 건강과 체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아 너 체력 여전하냐...? 나 넘 떠러짐...”


“나도 그러킨 한데... 난 아직 나쁘진 아는 듯... 저번에 동기도 업어줌...”


내가 반쯤 감긴 눈으로 되물었다.


“헐 누구”


“H...”


H는 167cm의 성인 여성이었다. 그걸 업는다니, 나는 완전히 어부바에 홀려버렸다.


“대바악... 체력 미쳤네... 근데 나는 못 업지 않냐...? 솔지키”


“왜 못 업게써. 업을 수 있쥐.”


“햐! 업어조라 그럼!”


“그뤠 좌!”


Y는 그대로 나를 업고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380m 거리였다... 술에서 깬 다음 날 알코올도 막을 수 없는 그의 벤츠력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자리에서의 배려는 생각보다 어렵다. 알코올이 자신의 행동 결과를 예측하고 억제하는 전전두엽 부위를 마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술이 들어가면 생각도 행동도 더욱 일차원적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 상황에서 Y가 보여주는 행동이 더한 배려라는 건 놀라운 일이다.


Y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수 백, 어쩌면 수 천 번의 술자리를 가지며 꽤 많은 배려를 서로 주고받는다. 서로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있기를, 단단히 정신 차리기를, 밤 길에 해코지 당하지 않기를, 무사히 집에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바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찬 바람을 같이 쐬고,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단 걸 나눠 먹고, 택시 번호판을 찍는다.


나는 술자리마다 꼭 한 명씩 존재하는 유정 선배를 본다. 그날의 유정 선배 덕분에 수많은 여자들이 무사히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즐거운 술자리가 즐겁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오늘도 힘내고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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