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돕는다는 건 미래의 나를 돕는 일이었다
그날은 동생이 상기된 목소리로 집에 들어왔다. 빗방울에 조금 젖은 어깨에도 굴하지 않고 잔뜩 미소 짓고 있었다. 두 뺨은 상기되어 있고, 두 눈이 반짝거렸다. 친구네 집에서 하루 자고 와서 기분이 좋은 걸까 싶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내가 묻자 동생은 오늘 행복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들을 거냐고도 물었다.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긴데도? 응, 그럼 더 좋지. 내가 손가락으로 OK 표시까지 보이고 나자 동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오늘 일진이 썩 좋지는 않았어. 언니가 올리브영에서 팩을 사 오라고 했잖아. 어제 언니 것을 사면서 나도 친구들이랑 쓰면 좋겠다 싶어 내 것도 샀어. 그런데 팩이 나한테는 별로더라고. 뜯지 않은 1세트는 오늘 환불해야겠다 싶었어.
여름 장마 기간이라 어제 친구네 집으로 갈 때도, 친구네 집에서 놀 때도, 잠을 자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비가 많이 오는 거 있지? 비가 와서 친구 집에서 나가기 싫었는데 어쨌든 집에는 와야 하니까… 친구들이랑 빠이빠이 인사하고 친구 집에서 나왔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올리브영이 있거든. 거기서 팩 하나를 환불하고 다시 억세게 오는 비를 뚫고 버스정류장으로 갔어.
버스정류장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고 나는 그 옆에 앉았어. 가만히 앉아서 영수증을 확인하는데 환불영수증에 팩 두 개로 되어있는 거야. 하… 한숨이 나오더라고.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다음 날에 갈까 생각했지만 그러면 당일 시재가 비잖아. 당장 오늘 알바생분이 곤란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 다시 억세게 오는 비를 뚫고 올리브영에 갈 수밖에… 가서 환불을 제대로 다시 했어.
그러고 나서 다시 장대비를 뚫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더니 좀 많이 피곤하더라고. 내가 얼마나 피곤했냐면 비 좀 맞는 건 신경도 안 쓰였어. 비를 왜 맞냐고? 그 버스정류장은 중학교 바로 맞은편에 있어서 유독 차가 많이 다녔거든. 거기다 도로 곳곳은 패인 부분이 많아서 차가 지나갈 때면 정거장까지 빗물이 막 튀기더라고... 근데 나는 그거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그냥 앉아서 다 맞고 있었어. 그때 옆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서 나를 불렀다? 옆을 쳐다보니까 할머니께서 무지개 우산을 펼쳐서 다리에 덮어놓고 계신 거 있지. 내가 버스정류장에 처음 왔을 때는 이렇게 안 계셨었는데 말이야.
어쨌든 말을 걸어오실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내가 ‘네?’ 하니까, 우산을 펴서 이렇게 다리 위로 덮어놓으면 물 맞을 일이 없대. 그러니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거 있지. 할머니는 내가 없던 시간 동안 해결 방법을 찾으셨나 봐. 어르신의 지혜란… 바로 ‘헉… 그렇구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고 나도 그렇게 냅다 했어.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다리에 우산을 덮어 놓은 두 사람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아? 맞은편 사람들이 보면 좀 웃기겠다 싶었어.
그러다 할머니께서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말씀하시더라고. 그 대화를 시작으로 우리는 조곤조곤 스몰톡을 나누게 됐어. 할머니께서 스크린을 보시더니 206-1번 버스 도착이 5분 남았다는데 5분은 무슨 20분간 오지를 않는다고 나한테 말씀하시는 거 있지.
아무래도 이상하긴 했어. 몇 분째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이 변하지를 않았거든. 버스정류장에 있던 안내스크린이 고장 난 것 같더라고, 원래 그러잖아 가끔. 핸드폰을 들어서 네이버 지도랑 경기도 버스 어플을 켰어. 버스 정보를 확인해서 정확히 언제 도착할지 말해드렸지. 내가 핸드폰을 보고 시간을 알려드리니까 어디서 그런 걸 보냐고 물어보시길래 어플 사용하는 법을 설명해 드려야겠다 싶었어.
어플 다운로드부터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핸드폰을 받으니까 경기도버스안내 어플이 이미 있더라고. 아마 그것도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었겠지. 나는 어플을 업데이트하고, 할머니가 매일 오신다던 이 버스정류장을 즐겨찾기 해놨어. 그리고 버스 시간을 어떻게 확인하면 되는지 천천히 설명해 드렸어.
가만히 들어보니까 할머니께서는 동사무소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계신대. 그래서 매일 같은 시간대에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시는데, 집에 나오기 전에 버스 시간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하셨다는 거 있지. 근데 이젠 그럴 수 있잖아. 너무 좋아하셨어. 혼자 사셔서 도움을 청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는데 내가 알려줘서 이제 그럴 수 있다는 게 너무 고맙다는 거야. 난 별로 한 게 없는데, 감사 인사 받는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으음, 언니도 알잖아. 내가 곤란한 사람을 쉬이 지나칠 수 없어 하는 거. 최근엔 걱정되는 분들이 많아 경찰 신고나 응급 신고도 많이 하고 그랬으니까. 그런 일을 하다 보면 몇 시간이고 길에서 기다리곤 하잖아. 그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친구들도 최근에 너무 선행을 베풀지 말라고, 호구 취급당한다고 얘기하더라고. 응, 다 걱정돼서 하는 말인 거 알지. 그런데 오늘, 내 배려가 만들어 낸 결과를 보고 있으니까 뭔가 더 뿌듯하고 어쩐지 조금 울컥했어. 남을 돕는 일은 역시 잘못된 게 아니구나 생각하게 된 거 있지… 그냥 내가 노인 분들한테 약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할머니께서 고마워하시면서 뭐라 하지, 그 우마이봉 있잖아. 그 우마이봉같이 생겻는데 곡물 26가지 어쩌구 되어있는 그거. 아 크리스피롤이라고. 응, 어쨌든 그거를 4개인가 6개를 받고, 젤리도 받았어. 진짜 한가득 주셨어. 봐 봐.
어쨌든 할머니랑 전화번호도 교환했어. 시간이 지나면 앱을 필수 업데이트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러다 보면 UI가 바뀔지도 모르고, 뭐 그러지 않더라도 궁금한 게 또 생기실 수도 있잖아. 어쨌든 우리가 탈 버스가 도착해서 같이 버스를 탔어. 내가 먼저 내려야 해서 할머니랑 버스 안에서 빠이빠이했어. 끝까지 고맙다고 해주시더라. 근데 난 오히려 내가 고마웠어. 오늘 온종일은 기분이 좋을 것 같아.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동생이 받아온 크리스피롤을 받아먹었다. 과자는 건강한 맛에, 고소하고, 달콤했다. 와작와작, 이게 친절함의 맛이구나.
나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