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라산 등산길의 친절한 여자

그 친절에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by 최초록별

나는 한라산이 높은 산인지 몰랐다. 산행 난이도가 뒷산 타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 10명 중 10명이 나를 향해 인자한 웃음을 띠고 만다. 허허, 당신의 무식에 경의를 표합니다.


웃긴 얘기를 위해 과장하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치의 거짓 없이 정말이었다. 물론 나도 한라산이 국내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걸 알긴 알았다. 초중고등학교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한라산이고, 북한까지 포함하면 백두산이다'라는 말을 몇십 번이나 듣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어떤 우주의 확증편향 때문인지 나는 한라산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등산은 제일 쉬운 산이라고 거하게 착각해버렸다. 왜 동네 뒷산 같다고 생각했냐면... 내가 떠올리는 한라산의 이미지가 평원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한라산이 완만한 평원길로 이어질 거라고 단단히 착각해버렸다. 영실코스에서 윗세오름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그 고원 속 평원 말이다. 바닥에는 나무 태크가 깔려 있고, 양옆으로는 낮은 초목들이 자리하고, 모든 시야가 뻥 뚫려 있는 이국 같은 그곳... 나는 그 길이 한라산의 대부분일 거라고 거하게 착각하고 말았다.


한 순간의 무지가 벌인 일은 용감했다. 나와 친구는 각자 동네마실용 운동화와 슈팬 운동화를 신고 한 겨울에 한라산을 등반하러 떠나버리고 말았다. 와중에 짧은 시간 동안 후딱 갔다오겠다고 야무지게 영실탐방로를 골라놓은 상태였다. 블로그에서 다른 사람의 등산기를 여럿 보고, 모든 탐방로를 꽤 꼼꼼히 살펴봐서 한라산의 모든 대피소까지 알고 있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 나는 아직도 내가 뭐에 씌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우리는 숙소에 친구 2명을 놔두고, 한라산을 오르러 출발했다. 그런데, 산타기엔 상대적으로 너무 늦게 출발했다고, 곧 출입이 통제될 거라고 택시를 타라는 거다. 현금으로 만 원이라고 했다. 30분의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택시비가 만 원이라니. 하지만 오르긴 해야지. 아저씨 말에 납득하고 산에 출발했다.


음. 근데 초입부터 계단이 너무 많았다. 안개가 껴서 정말 짧은 거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몇 계단 밟았을까, 친구가 내려가자고 앓는 소리를 냈다. 만 원이나 냈는데 내려가자니, 만 원어치 할 수 있다! 걸을 수 있다! 한참 달래가면서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하산하시는 여자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웃도어를 풀 장착하시고, 상체보다 큰 백팩을 메고, 비닐우비를 쓰고 계셨다. 그분은 우리를 발견하신 듯했다. 우리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물었다.


"혹시 지금 등산하시는 거예요?"


"네!"


그분의 눈이 커졌다. 우리의 해맑은 대답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본격적인 질문은 이제부터였다.


장갑은 있으세요? / 아 저만 있어요. (얇은 털장갑을 펼쳐 보인다)

신발은 그걸로 괜찮아요? / 괜찮아요. 한 번 해볼게요. (뭘?)

아이젠은 있어요? / 와, 그게 뭐예요? (웃음)

우비는 있으시고요? / 없어요. 필요하나요? (미소)


현명한 질문에 어리석은 답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것저것 물어도 이거저거 전부 없다고 하니 그분은 아무것도 없이 이렇게 등산하는 거냐고 안절부절못하셨다. 우비를 벗으시면서, 저는 이제 하산해서 필요 없으니 드릴게요. 라고 하고 가방 속을 뒤지시더니 초코바 몇 개를 쥐여주셨다. 이것밖에 없어서 어떡하냐고 몇 번이고 말씀하시면서. 머리를 야무지게 질끈 묶고 하산 중인 그 분보다 헝클어진 머리 상태를 가지고 등산 중인 우리를 그분은 정말 걱정되는 눈으로 몇 번 더 보시고 내려가셨다.


짧은 만남 속에 우리 손에는 셀카봉 1개, 핸드폰 1개가 아닌 드디어 등산에 도움이 될 법한 우비와 초코바가 들려 있게 됐다. 친구가 자신의 패딩은 방수가 된다며 양보해준 덕에 우비를 쓰고 다시 산을 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둘 다 머리가 새하얗게 얼어버렸다. 꼭 등산길에 있는 얼어 있는 밧줄 같았다. 그게 너무 웃겨서 와 신기해!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단히 얼어있는 현무암 돌멩이가 눈앞에 펼쳐졌다. 건널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없었다. 내가 신은 건 밑창 다 닳은 오래된 운동화인 만큼 나는 만화처럼 넘어졌다. 한 발을 들고 한쪽으로 쏠려 후욱! 하고 자빠졌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계속 가기로 했다. 언 돌멩이 위로 걸을 때마다 계속 미끄러질 것 같아서 두 손을 합쳐 네 발로 건넜다. 친구는 먼저 건너갔다. 스파브랜드 새 운동화의 승리였다. 건너편에서 친구가 짐승 보행하는 나를 촬영했는데, 나중에 보니 바람 소리가 얼마나 큰지 동영상에 우리 목소리가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윗세오름까지 가고 나서야 대피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아까 만났던 언니와 똑같이 중무장하고 있었다! 모두가 등산화를 신고, 등산화 밑에 아이젠을 끼고 형형색색의 고급 아웃도어를 입고 있었다. 목도리와 장갑, 등산스틱도 멋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우리가 정말 대책 없이 츄리닝에 패딩 하나만 덜렁 입고 산에 올라버렸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컵라면을 먹는 동안 붙임성 좋은 분들이 우리에게 이러고 올라온 거냐고 꼭 말을 붙여주셨다. 그렇다고 하자 젊은 게 좋다며 웃어주셨다. 포토 스팟에서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다음부터는 꼭 아이젠이라도 끼고 오라는 덕담도 빠지지 않고 들었다.


날씨가 날씨였던지라, 등반 이후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깔끔히 내려왔다. 이 대책없던 이야기는 둘 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온 덕에 '산 중턱 휴게소에서 먹는 컵라면은 정말 맛있더라, 그때 왜 그랬을까' 정도로 웃고 넘기는 즐거운 에피소드가 되었다.


언젠가 그분을 만나게 된다면 말해드리고 싶다. 등산에서 먹는 초코바는 너무 맛있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등산 갈 때 에너지바를 챙겨 다녀요. 전해주신 우비 덕분에 저는 패딩도 젖지 않고 깨끗하게 내려왔어요. 저희가 준비 없는 겨울 산행에도 다치지 않았던 건, 저희 둘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보여주신 친절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아마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분은 여전히 산을 타고 계시지 않을까?

그분이 산행하시는 동안에도 어떤 부상도 없이 항상 무사히 하산하셨으면 좋겠다. 그분이 보였던 친절만큼 산이 언제나 그 분에게 친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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