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없는 선의는 햇볕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중학교 때 나는 맹랑한 꼬맹이였다. 어떤 점에서 맹랑했냐면, 뭐든 잘하기를 꿈꿨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만능맨/만능걸은 힙HIP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한참 유행했던 책 '뭐는 못하는 아이, 뭐는 잘하는 아이' 시리즈 제목처럼 말이다. 나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아이를 꿈꿨고, 그게 내가 학교가 끝난 뒤에 운동장에 남아 있던 이유였다.
며칠 뒤의 축구 수행평가에서 A+을 받고 싶다! 멋있으니까!
나는 축구라곤 해본 적 없으니까 연습이 필요했다.
적당히 비어 있는 방과 후 운동장에서 체육 창고에서 축구공을 꺼내왔다. 요령 없이 차고, 가져오고, 다시 차고를 반복하고 있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서 축구 하니?"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 찰랑거리는 긴 머리, 적당히 짧은 치마, 자연스러운 반말. 명찰의 색을 확인하지 않아도 100% 선배였다!
나는 잔뜩 움츠러 들었다. 알다시피 초중학교의 1년이란 하늘과 같은 격차이지 않은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저번에 민수가 운동장은 고도의 눈치싸움이라 그랬었는데... 1학년이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2-3학년이 쓰지 않을 때뿐이라고 그랬었어... 그러면 이제 비켜드려야 하나? 아니 근데 운동장이 이렇게나 넓은데...! 헉 설마. 이건 '친구야 돈 좀 있어? 언니가 버스비가 없어서.' 같은 상황일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친구들이 억울한 목소리로 풀어주던 다양한 방식의 삥뜯긴 이야기가 머릿속을 부지런히 장식했다. 이제 내 차롄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나는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축구 연습... 하려고...
"왜?"
어, 이건 예상치 못한 말인데.
그 언니는 아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내게 이유를 물었다. 삥 뜯는 건 아닌가봐! 나는 아까보단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개미만한 목소리로 '수행평가를 앞두고 있는데 꼭 A+을 받고 싶어서 연습하려고 남았다'는 얘기를 흐리멍텅하게 설명했다.
"축구는 어디까지 배웠는데?"
"수업 시간에 인사이드 킥 조금..."
"해 봐."
네? 여기서요? 나는 명찰 색을 확인했다. 초록색. 선배가 맞다. 후배는 선배 말을 잘 들어야지. 망설이는 발걸음으로 공을 차 냈다. 공은 형편없이 굴러갔다. 힘없이 이상한 각도로 흐물거리는 공이 선배의 눈에 담기고 있었다. 쪽팔려어어~
"다른 것도 알아?"
"네. 인스탭킥도 배웠긴 한데..."
어김없이 해보라는 말이 떨어졌고, 나는 다시 한번 공을 찼다. 내 발은 허공을 연거푸 차대다가 이상한 곳을 향하여 여행을 떠났다. 선배는 군말 없이 공을 주어 온 뒤에 내게 말했다.
“너는 딱 2개만 연습하는 게 좋겠다.”
나는 끄덕였다.
"이게 인사이드 킥이야."
선배가 찬 공이 부드럽고 정확하게 목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깔끔한 슈팅.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지는 슛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축구를 잘할 수 있냐고 묻자, 언니는 축구를 좋아해서 남자애들 경기에 종종 끼곤 한다고 답했다. 그렇구나, 멋있다! 끄덕끄덕.
언니는 시간을 들여 나에게 토킥으로 공을 띄우는 법, 보다 정확한 인사이드킥을 알려주었다. 수십 번의 발차기, 수십 번의 달리기, 수십 개의 조언 속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옆얼굴을 반짝반짝 빛내는 햇빛 속에서 언니가 말했다.
"너 이 정도면 A+은 문제없을 거야."
나는 곧바로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 인사를 뒤로 한 채로 언니는 손 한 번 흔들고 깔끔하게 사라졌다. 진심을 담은 감사였다. 이름도 모르는 후배를 위해 몇 시간을 남아주다니, 심지어 싹싹한 후배도 아니고 어색함에 부들부들 거리는 후배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언니가 몇 반인지, 우리가 또 만날 수 있는지 격 없이 물어보지도 못했다. 아마 가장 보람 없을, 앞으로의 관계 진전을 기대할 수 없는 이름 모를 후배임에도, 기꺼이 방과 후 시간을 투자해준 거다. 대가를 기대할 수 없으니 공수표 종이짝 투자였다.
며칠 뒤, 언니의 말대로 나는 A+를 받았다.
친구들이 왜 이렇게 잘하게 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운동장에서 언니의 도움을 받아 조금 연습했다고 답했다. 누구냐 물었을 때는 뭐라 답할 수 없었지만, 나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그 언니를 묘사하곤 했다.
그전까지는 이름 모를 사람의 선의란 건 무서운 것에 가까웠다. 상대방을 알지 못했던 만큼, 딱 그만큼 두려웠다. 나는 항상 관계없는 사이에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도 상대방이 무언가를 준다면 언젠가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내심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날의 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아무 사이가 아니어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그 이후로는 상대방을 알지 못하는 만큼, 딱 그만큼 기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름 모를 친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름 없이 친절을 기쁘게 베풀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언니가 내 인생에서 첫 스타트를 떼어줬던 친절 릴레이에 항상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