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퇴사 버스 안의 친절한 여자

작은 친절은 모든 서사를 단 한 번에 반전시킬 수 있다

by 최초록별

건물 밖에는 아직도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퇴사 날에 비가 쏟아질 게 뭐람. 재앙이다. 재앙.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하늘이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대신 울어주려나 보다 하면서 창문 밖의 빗방울을 관찰했다. 울다 그칠 기미는, 음, 없군. 우는 하늘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팀원분들의 마지막 배웅이나 실컷 즐겼다.


우산을 펴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다. 퇴사 후 어떤 커리어를 밟아야되나 같은 건설적인 고민때문은 아니고, 그저 오늘도 집에 돌아갈 길이 너무 멀기만해서 발걸음이 천근 같았다... 그렇다...
나는 퇴사의 달콤한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바닥이었다.


매일을 경기북부에서 강남까지 빨간 버스(시외버스) 안에서 편도 2시간을 서서 견디며 보냈다. 거듭되는 야근에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은 체력을 한톨도 남겨놓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제발 버스 자리가 있기를 바라며 건물을 나섰지만,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질릴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마지막 날까지 지겨운 강남이여...'


내 양손에는 짐이 가득했다. 회사에 슬리슬쩍 늘려나갔던 짐이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온 데다가, 감사하게도 팀원분들의 마지막 배웅과 마음을 양 손 가득 받은 덕이다. 양어깨와 양 손으로 짐 4개를 가득 들었다. 여기에 기적같이 우산까지 쓰고 있으니 내 얼굴 위로 흐르는 게 빗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눈으로 빗물을 흘리며 간절히 바랐다. 제발 버스에 자리가 있기를. 오늘만이라도 안온히 집에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그러나 도착한 버스는 이미 만원. 앉을 수 있는 자리는 0석이었다.


이걸 타자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타지 않자니 다음 차에 좌석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비가 오는 날이라 사람들은 더 많이 버스를 타겠고, 버스는 빗길에 밀리고 밀려 더 느려졌겠지... 그저 도착 시간이라도 일찍 당길 수 밖에. 결국 그냥 버스에 올라탔다. 좁은 버스 통로 뒤로 사람이 끊임 없이 들어찼다. 비오는 날 만원버스는 도저히 즐거울 수가 없다. 그것도 나만한 짐 4개를 들고 타면 더 그렇다. 나는 사람이 들어찬 버스 복도에서 짐을 모아 쇼핑백을 더 큰 쇼핑백에 구겨 넣어도 보고, 열심히 우산을 접어 짐을 최대한 줄여보려했지만 버스에서 속절없이 휘청였다.


제작 때부터 장거리 이동과 높은 하중을 버티리라 계산하지 않은 쇼핑백의 손잡이는 손가락을 끊어먹을 듯 내 살을 집어 삼켰다. 손 아프다고 짐을 내려놓자니 다 젖어버릴게 분명했다. 젖어서 쇼핑백이라도 터지기라도 하면 재앙은 곧 재난이 되겠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나를 쳐다보다 폰 자판을 치다, 또 나를 쳐다보다 웃는 걸 10번도 넘게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우연이라고 해도 이상하게 신경이 돋고 짜증이 났다. 비오는 날 자기 만한 짐을 엄청나게 들고 탄 웃긴 여자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신경이 쓰였다. 시야에서 그가 보이지 않게 최대한 앞쪽을 바라보니 다리는 더 아프고...


'아니, 이건 왜 또 안 돼. 진짜 미친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비가 와서 그런지 데이터도 안 터졌다. 영상 시청은 커녕... 노래 마저 계속 켜졌다, 꺼졌다 말썽이었다... 한 소절 듣기 후 몇 분간의 정적이 계속 됐다. 되다다 안되다 하는게 내 인생 같이 아주 얄미워서 때려주고 싶었다. 오직 느린 데이터 속도에 기능하는 건 카톡뿐이었다. 아, 카톡 왔다.



[오늘 제사다 –아빠]



와...! 빈 속에 밥도 못 먹고 집에 가면 또 제사상에 절을 해야겠구나... 정말 꼭 알고 싶던 정보였다!


그러고 있길 1시간 20분쯤,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그 시각 이미 내 두 눈은 동태보다 흐리멍텅했다. 그럴 법 한 게 동태는 장거리 출퇴근 안하잖아. 아무튼 앉자마자 나는 우산을 좌석에 꽂고, 어깨에 있는 짐은 풀어 무릎에 놓고, 나머지 짐들은 그 위에 쌓고 쌓아 안는 형태로 만든 뒤 그 위에 손을 올려 핸드폰을 했다. 노래는 여전히 나올 기미가 없었다. 다 포기하고 노트 앱이나 켰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일기를 썼다.



[인생이 약간 불량배 같다.

버텨? 어? 이래도 버텨? 어쭈? 그럼 이건? 이건이건?

그럼 난 그냥 맞는다. 언제까지 맞고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영원히 인생에 눌린 쭈구리인채로 그 지독한 괴롭힘을 버틸 맷집만 늘어가는 느낌이다.]



라고 에버노트 검정화면에 하얀 텍스트를 힘 없이 박고 있는데 옆에서 툭툭 건드는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처음보는 여자분이 날 보고 계셨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이어폰을 뺐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상대의 입모양만 뻐끔뻐끔 움직이는 상황에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네? 네? 하며 다시 묻고 있으니, 내 손 안에 초콜렛 두 개를 쥐어주셨다. 마주 본 얼굴 속 입술이 몇 번 떼어졌다 다시 붙었다.


그 마지막 말은 ‘드세요’ 였을까. 내가 뭐라 답하기 전에 그 분께서 다시 앞을 보시고 말았다. 어쩔 도리 없이 나도 앞을 보고 있는데 뭐가 뭔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뭐, 뭐지.


얼떨결에 쥐어진 손가락을 다시 펴보니까 단 카라멜 향이 훅 하고 퍼졌다. 매캐한 매연 냄새와, 습한 공기의 냄새.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린 단 향이 유달리 생생하게 느껴졌다. 타이밍 좋게 이어폰에서도 노래가 팍하고 재생됐다. 버스마저 역 근처로 들어섰는지, 창문 밖으로 들어온 화려한 불빛들이 두 눈을 감쌌다. 갑작스럽게 코부터, 귀, 그리고 눈까지. 순식간에 멈춰있던 모든 감각기관이 제 기능을 재시작한 느낌이었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완전히 드라마 같았다. 한 에피소드가 끝나기 직전에 나오는 드라마의 OST. 이번 화의 힘든 일 복잡한 일은 다 끝났으며, 지금 이 순간, 여기가 바로, 이번 화의 엔딩을 장식할 하이라이트 지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바뀐 감정에 쓰고 있던 문장을 마무리할 수가 없어서 핸드폰 화면을 꺼놓은 채로 잠시 감정을 골랐다. 방금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을 다 본 한 명의 시청자가 된 듯이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되는데, 좀처럼 타이밍이 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며 힐끗힐끗 눈으로만 쫒는 사이에 그 분은 그렇게 버스에서 내렸다.


다다음 정거장에서 나도 버스에서 내렸더니 어느덧 비는 그쳐 있었다. 우산 없이 걷는 길은 조금 더 쉬웠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빠가 내가 좋아하는 메밀소바를 만들어 놨다. 제사라서 바빴을텐데도 나를 챙겨줬다는게 기뻤다. 소바를 먹고, 입 안에 초콜렛을 털어 넣었다. 향만큼 단 부드러운 카라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좋다.


그 분은 버스에 힘겹게 서 있던 나를 계속 눈으로 쫒고 계셨던 걸까, 아니면 내 일기를 보셨던 걸까, 어떤 마음을 안고 친절을 베풀어보기로 용기 내주신 걸까. 뭐가 되었든 감사한 일이다. 그 덕분에 나는 아직도 퇴사날을 멋진 드라마 한 편으로 기억하니까. 작은 친절이 그 모든 기억을 단 한번에 반전시켜버렸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걱정한 것들은 이미 전부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 분의 친절이 없었다면 그렇게 극적이진 못했을 것이다. 걱정과 불행을 미래로부터 끊어주는 마법이 친절에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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