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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r 11. 2024

공짜로 하루 보내기

스킨케어, <가여운 것들>

오늘은 어제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하루에 조금조금씩 일어나는 시간을 땡기는 게 목표다(별 의지는 없는 목표). 지난 열흘 내내 12시 반에 일어났다. 그래서 자는 시간도 새벽 3시가 되어 이 굴레대로 계속 굴러갔다. 어제는 한시쯤 잠드니 11시쯤 깨졌다. 백수 생활의 백미는 늦잠이다. 주말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고 문자가 와있다. 회사 다닐 땐 책값이 지원돼서 제 돈 주고 책을 안 사봤는데 휴직 중이라 쌩 돈 내고 전공서 구입에 5만 원 넘게 줘야 하니 너무 아깝고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복지몰에서 교보문고 10% 할인 쿠폰을 받아서 샀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되는데 도서관 검색까진 했는데 책을 집까지 가져오는 것도 무거워서 싫고 새책을 항상 사서 읽던 습관으로 빌려 읽기가 싫다. 수입이 없으니 사소한 것도 크게 느껴진다.


오늘 낮에 카드사에서 무료 스킨케어 체험을 신청한 것을 가야 한다. 30만 원 상당의 무료 스킨케어 100% 지원이라고 하더니 선크림 세트나 진정패드도 무료로 준다고 한다. 리앤케이라는 곳에서 진행하는 이벤트다. 어차피 낮에 할 일 없는 백수니 해볼까, 하고 가볍게 신청했는데 결과적으론 앰플비 1만 원을 계좌이체 또는 현금으로 내야 하고 권하는 12회 등록이나 제품 구매를 고사해서인지 준다던 선크림 세트도 결국 주지 않았다. 가기 전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꼭 등록하게 만든다거나 환불 어떻게 해야 되냐는 글로 가득했는데 이미 예약을 해서 무르기도 뭐해서 갔다.


브래지어랑 상의를 모두 탈의하고 튜브탑 같은 가운의 찍찍이를 붙여 입고 안내받은 곳에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침대는 너무 뜨듯하고 안락하다. 무료 체험이라 별 기대 안 했는데 손 기술이 전문적이고 꼼꼼히 오래 마사지해 준다. 얼굴, 목, 승모근, 어깨, 윗 가슴 꼼꼼하게 그리고 열심히 해주는데 시원하고 풀리는 느낌이다. 눈을 스르르 감고 발라주는 앰플, 마스크를 올리고 명상에 빠진다. 명상에 빠진다기보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한다. 홈케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와서 누워서 모공 청소도 하고 피부 관리를 받으면 그 효과는 둘째로 치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피부 관리사는 제품을 눈앞에 보여주며 이렇게 좋은 제품을 이렇게 많이 뿌려준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만원이 든 무료 체험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은 뒤 따로 방으로 모셔가 내 피부에 어떠어떠한 케어가 필요하고 어떤 코스가 이루어질 것인지를 공을 들여, 진정성과 전문성이 느껴져 보이도록 열심히 설명을 하신다. 1회에 10만 원이고 12회~24회 치를 한 번에 결제해야 하는데, 무이자 12개월이 되는 카드사를 보여준다. 나는 체험을 해보려고 왔고 오늘 결제할 마음가짐으로 오지는 않아서 당황스럽다고 말한다. 집에 갔는데 하루 자고 나니 얼굴이 뒤집어질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덜컥 결제를 한다는 게 께름칙했다. 환불을 원한다고 도배된 인터넷 글들이 오버랩되었다. 그래도 마사지가 전문적이고 기분이 좋았으니 집에 가서 효과를 느껴보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니 당황한 그녀는 한 달에 5만 원 6회라도 하시면 안 되냐고 가격을 다운시킨다. 지금 가시면 이 가격에 혜택을 못 보신다고. 그래도 오늘 결제할 마음은 없던 나는 굽히지 않고 집에 가서 찬찬히 생각해 보겠다고 하니 그럼 제품이라도 구매해 달라고 말한다. 아, 제가 얼마 전까지 외국에 다녀왔는데 독일 화장품을 잔뜩 사 온 데다 다음 달에 출국 계획이 있어 아까 말하셨듯 면세점에도 입점한 브랜드라 하니 괜찮았으면 면세점에서 사봐도 될 것 같아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하니 결국 포기한 표정의 그녀는 나를 돌려보내주었다. 엄청 좋았으면 다시 가지 않겠는가.


배가 꼬르륵 거린다. 얼마 전부터 먹고 싶었던 돈까스를 네이버 지도에 검색한다. 신사역 돈까스. 내가 있던 5번 출구 근처에 매장 두 개가 있는데 그중 한 군데에 들어간다. 조금 이따가 영화를 예매해 놨는데 후다닥 먹어야겠다. 아직 저녁 시간 전이라 사람이 없다. 맛있는 경양식 돈까스다. 한국 와서 내 돈 주고는 처음 사 먹는 바깥 음식. 그래서 오늘은 총 3만 원을 쓴 날이다. 돈까스 12,000원, 왕복 차비 7,000원, 앰플비 10,000원. 아 2만 9천 원이구나.


영화관에는 3분 일찍 도착했다. 영화 시작 시간 이후에도 한참 후에 시작하는 걸 보면 영화관은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와도 되겠다. 작년에는 영화를 많이 봤다. 그래서 vip 무료 쿠폰이 두 개 들어와 있었다. 평일 무료 쿠폰 하나를 써서 <가여운 것들>을 예매했다. 더 랍스터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봤어서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예매했다. 여러 가지가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홍보 문구와 함께. 입장하기 전에 무료 팝콘 M 쿠폰을 이용해 어니언 팝콘을 받았다. 공짜로 먹는 어니언 팝콘은 정말 꿀맛이다. 그냥 짭짤하거나 달짝지근하기만 한 팝콘과 다른 새로운 중독적인 맛. 아직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없다. 거의 전세 내고 봤다. 우리 줄에는 나밖에 없다. 아주 가끔 뒷자리 아줌마가 발로 차는 게 느껴져 거슬린 것 빼고는 아주 좋다.


인간은 추잡하다. 인간의 본연의 욕구와 생각은 무한히 추잡하다. 추잡한 게 어떤가. 고상한 척하고 싶은 인간은 추잡한 걸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이론과 생각을 만들고 연구한다. 우리에게는 모두 벨라의 모습이 있다. 실험적이고 재미있고 감각적인 영화. 다른 영화에서 매력없는 여자로 보였던 엠마스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쌀쌀해져 후리스를 움츠리며 집까지 걸어왔다. 아까 신사역 가는 지하철에서 나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근황을 전했다. 외롭고 심심할 땐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따뜻함이 힘이 되고 의지가 된다. 그중 한 사람과는 내일 시간 되냐고 하니 다음 주에 보기로 했다. 한 사람에게는 답장이 와서 영화 본 얘기를 했고, 한 사람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답이 없지만 그 자체로 좋다. 내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으니. 직장에서 말을 놓고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연락한 사람들이 모두 직장 동료들이고 나이도 다양하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고 씻는다. 머리를 감고 머리에 쓰는 헤어팩이 집에 있길래 두르고 나와 작은 토마토 네 개를 믹서에 넣는다. 우둘투둘 갈리는 소리가 나고 전원을 끄려는데 손에 묻은 물 때문에 순간 손에 뜨끔하고 전기가 돌아 깜짝 놀랐다. 역시 내가 하는 일이 이렇지 뭐. 놀랍지도 않다. 선물 받은 입구가 넓적한 덴비 컵에 토마토를 따르고 아카시아 꿀을 휘- 두른다. 영양이 어떻건 난 달게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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