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Oct 25. 2024

바퀴벌레를 믹서기에 가뒀는데

엄청 큰 갈색 바퀴벌레가 믹서기 안으로 들어갔다. 밝은 갈색에 긴 수염이 달린 것도 징그러운데 크기도 컸다. 바퀴벌레는 왜 다른 풍뎅이, 벌레 같은 것보다도 더 징그럽다는 느낌이 들고 싫을까. 회사 창립 기념품으로 받은 꽤 비싼 믹서기이다. 며칠 전 복자(대학교 때 인사동 초입에서 목이 너무 말라 복숭아+자두 주스=복자를 맛있게 사 먹은 기억에)를 갈아먹고 씻고 뚜껑을 약간 비스듬히 뒀었다. 그 틈을 타고 요놈의 바퀴벌레가 들어간 것이다. 요즘 바퀴벌레가 종종 나타나는 것도 징그럽고 짜증 나던 차다.


바퀴벌레 하니 떠오른 건데 가끔 바선생이니 묘선생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너무 현학적이고 과도하게 어려운 말과 화려해서 잘 안 읽히는 문체가 많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쉽게 쓴 글, 잘 읽히는 글이 좋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랄지 청중이 들었을 때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은 글쓰기/말하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발표를 자주 하고 듣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지만 배우는 우리로서는 지식도 영감도 되지 않은 발표들을 들으면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하품이 나온다. 자기야 재밌지, 핵심만 간단히 얘기할 걸 수업 주제도 빗나간 내용을 뭐 저리 길게 얘기해? 하고 속에서 불만이 끓어 오르지만, 그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으니 멍하니 앉아있으면서 경청하는 척만 한다. 내 눈을 본다면 집중하지 않고 영혼이 없는 걸 느낄까 봐 발표자와 눈은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발표를 싫어한다. 달변가는 당연히 아니며 말을 유창하고 조리 있게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이 빨리빨리 잘 생각이 안 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 입을 통해 조리 있게 설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예전에는 대본을 써서 거의 외워가거나 키워드를 적어갔는데, 몇 번 하다 보니 덜 떨리게 되고 이젠 대본도 안 쓰고 그냥 전날 내가 만든 슬라이드를 넘겨보면서 뭘 얘기할지 대략 마음속에 그려보고 가도 수월하게 얘기가 된다. 내가 부족한 능력인, 유창하게 그리고 논리적이고 매력적으로 발표를 하거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발표를 싫어하는 나도 하고 싶은 얘기는 있다. 가능한 효과적이고 흥미롭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업무 경험을 연결시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얘기도 섞어서 하고 솔직한 생각을 말하기도 하는데 의미 있는 질문들이 오면 나도 흥미롭다.


하루가 지나 집에 돌아와서 아 맞다, 하고 믹서기에 가둔 바퀴벌레가 생각났다. 아직도 출구를 못 찾은 채로 사정없이 믹서기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하루나 지났는데 아직도 열정적인 게 무섭고 대단하다. 결국 가족 구성원의 도움을 받아 한 명이 입구를 열자마자 휴지와 함께 손을 넣어 짜부시켜 죽였다. 믹서기는 뜨거운 물을 팔팔 끓여 여러 번 씻어냈지만 곳곳을 돌아다닌 자리가 너무 찝찝하다. 그래봤자 며칠 지나면 또 까먹고 또 열심히 갈아먹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