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되게 추워요
- 지하철에서 오래된 옷냄새 나네요
- ㅋㅋㅋㅋ이제 겨울
- 코트 입는 사람도 있어요?
- 나 코트 오반가 싶었는데 패딩 입은 사람 많네
- 내 앞에 방금 털모자 지나감
오늘 영하의 기온으로 떨어진다 하더니 아침(이라 쓰지만 12시 다돼서 일어나는 나의 삶)에 일어났더니 단체방에 친구들이 춥다고 난리다. 오늘은 집에서 공부하는 날이어서 느지막이 일어나 비지찌개에 얼마 전에 담근(물론 엄마가) 정말 맛있는 김장 김치, 굴을 넣고 만든 겉절이, 잘 구워진 곱창김에 점심을 먹었다. 우리 엄마는 김장 김치를 진짜 뚝딱 한다. 컴퓨터로 과제를 하다가 나와서 좀 도와줄까? 하면 니가 뭘 해, 방해만 되지, 그럼 여기 김치나 좀 옮겨줘, 하고 보면 어느새 완성이 되어 수육을 삶고 있다. 집에 기생을 하며 살고 있는 캥거루족인데 집안일을 하나도 안 시켜서 좋다. 캥거루족은 가끔 장 볼 때 따라가서 카트에 과자를 몇 개 담으며 소박한 재미를 느낀다.
학교에 안 가는 날은 집에서 리딩을 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과제를 한다. 이번 학기에는 학점을 꽉 채워 들으니 장점으로는 수업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지식을 쌓게 되는 점, 단점으로는 주말도 없이 공부를 하게 되는 점이다. 어떤 주는 일주일에 발표만 3개가 겹쳐서 과부하 되고, 그렇지 않은 주도 보통 읽을 논문에 치인다. 뭐그렇다고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8시간씩 매어 있고 집중하는 건 아니다. 가끔 약속을 나가기 충분하고, 집중해서 딱-하고 끝내면 쉬는 시간을 가진다. 오늘도 내일 발표할 피피티를 하나 만들고, 기말 연구 보고서 주제를 뭐로 잡을지 각종 학회지와 논문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어제 갑자기 땡겨서 먹고 싶었던 돈까스를 먹으러 나왔다.
몽골에서 사 온 얇은 캐시미어 남색 스웨터를 처음 개시해 봤는데 적절했다. 평소에 동네 산책하러 나갈 때는 노브라로 다니지만 그래도 브라는 하기로 했다. 중간 정도 짙은 배바지 청바지를 입었다. 배바지라 위에도 벙벙하게 입으면 뚱뚱해 보이는데, 그냥 개의치 않고 부하고 벙벙한 살구색 털 후리스를 걸쳤다. 어차피 머리도 안 감고 겨우 세수만 해서 엉망인데 뭘.
돈까스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어제 낮 산책길을 떠올렸다. 감정을 털어버리고 생각을 정리하기엔 산책의 효과가 좋다. 지나가던 3인 가족이 “서울대다” 하면서 지나간다. 내 자신의 복장을 의식해 보니 서울대 과잠을 레깅스 위에 입었다. 까만 바람막이인데 거의 운동할 때만 입는다. 운동할 때 막 입기 좋다. 어느새 갈대는 내 키를 훌쩍 넘어 높게 자랐고, 그 목화솜 같은 하얀색 머릿대는 바람에 우아하게 흩날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 풀냄새가 나던 이 길은 이미 가을색으로 물들었고, 멀리 보이는 산 역시 톤 다운된 마른 낙엽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름에서 겨울이 되었다. 따뜻한 햇빛에 하천은 반짝반짝 빛나서 눈이 부시다. 예뻐서 사진을 찍는다. 낙엽 밟는 소리도 담아 동영상을 찍어 스토리에 올린다. 산책을 하니 마음이 정화된다. 8천보 정도 걷는 동안 혼자서 생각한다. 햇빛은 눈이 부시게 밝다. 자연의 냄새를 맡고 바스락바스락 낙엽 소리를 듣는다. 목욕이 잘 된 깨끗한 몸을 가진 까치들도 만난다.
하얀색 작은 멍멍이가 날 보고 짖으며 뛰어 온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엄마야~ 하고 걸음을 멈춘다. 강아지 주인인 젊은 부부는 얼른 목줄을 채운다. 여자는 민망했는지 강아지에게, “예쁜 언니라 질투하는 거야?” 하면서 나에게 미안하고 머쓱해하는 눈빛을 하며 지나간다.
<내가 느낀 산책의 순기능이자 역기능의 경로>
우울하고 무기력함 ->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안정됨 -> 에너지가 생김 -> 분노와 복수심이 생김
1인 테이블에 앉아 미리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주문기로 선결제한 돈까스가 나온다. 기계가 식당에서 주문받고 계산해 주는 알바생을 대체하고, 이제는 콜센터 상담원도 대체하고, 뭐 아나운서도 대체하니까. 인간의 노동은 어디까지 대체될까? 하루는 변호사 친구가 단체방에 의견을 묻길래 챗 지피티에 쳐봐라, 하니 아?! 하더니 쫘르륵 온 답변을 공유해 주었다. 간단한건 비싼 변호사에게 상담받기보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법이 탑재된 인공지능에게 공짜로 물어보면 편하고 좋지. 대체는 예견되어 왔지만 언제 대체할지, 나의 직업을 대체하게 될지, 인구가 줄고 기계가 발달하더라도 기계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면 저출산을 극복할 어떤 대안을 도출할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여기는 되게 옛날 노래를 틀어주네, 하고 생각한다. 시크릿의 별빛달빛인가랑 투에니원의 Fire가 나온다. 안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젊은 남자 직원들이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약간 오글거린다.
집에 가는 길에 조각 케잌을 하나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한다. 충동적인 생각이지만 며칠 전에 생일이었으니 한 조각 정도 먹으면 어때, 하고 스스로 정당화했다. 아까 일본 여행한 유튜브 영상을 봐서 일본 편의점에서 먹었던 롤크림이 생각나서 너무 먹고 싶었다. 아주 맛~있는 새하얀 고급 크림인 케잌을 먹고 싶은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없으니 포기하고 현실에 타협하며 그냥 투썸에 들어가 케잌을 하나 골랐다. 로투스 어쩌구 하는 케잌인데 안 먹어본 맛이어서 하나 산다. 집에서 따뜻한 차를 우려서 같이 먹어야지.
차가운 공기를 집으로 몰고 들어 오자마자 옷방에 가서 위아래 색깔이 안 맞는 수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 가서 손발만 얼른 씻는다. 전기 주전자에 생수를 콸콸콸 따라 버튼을 누르고 따뜻한 물을 기다린다. 세계 곳곳에서 사 온 차로 가득한 찬장을 한 번 두루 살펴본 뒤 갑자기 충동적으로 베트남에서 사 온 밀크 초콜릿 가루를 보며 케잌은 조금 이따 먹고 따뜻하게 핫쵸코를 타먹자, 하고 방향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