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일이 뭐라고
공황장애까지 오더라고.
전 직장을 다니면서 공황장애가 왔다. 지난 12월까지 대학교 행정직원으로 일하다 계약기간만료 3달을 앞두고 공황이 터졌다. 사건의 발단은 상사가 팀원 모두가 있는 단톡방에서 나를 매우 저열한 방식으로 비난했기 때문에.
일이 일어나기 두 달 전, 나는 교무과로부터 ‘해당사항이 있는 대상자에게 상반기 실적을 시스템에 등록할 것을 안내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실적에 따라 성과금이 부여되기 때문에 반드시 기간 내에 등록을 완료하여 검정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팀 내에서 대상자는 그 상사가 유일했으며, 나는 공문과 지침사항, 유의사항 등을 정리하여 1차적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관련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카톡으로 다시 한 번 안내 드렸고, 중요한 사항이니 반드시 메일을 확인해 달라고 덧붙였다. 그는 카톡 메시지를 읽었고 평소처럼 답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깜빡하고 기간 만료일까지 실적을 하나도 입력하지 않은 것이다. 교무과에서는 최종적으로 추가 검정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는 예정되어 있던 200만 원 가량의 성과금을 일절 받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비난과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전과되었다.
그는 모든 상사와 팀원들이 있는 단톡방에서 내가 3번, 4번 안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며, 나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에는 심각한 결함이 존재하며 내가 자신을 엿 먹이려고 부러 이런 일을 벌인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나의 만행을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단톡방에 공론화하는 것이라고.
메시지 화면창에 실시간으로 빼곡이 채워지는 그의 발언에 스크롤을 내리는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 밑의 잔 근육이 울룩불룩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길로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인근 정신과에서 진정제를 투약 받고 팀장에게 허락을 받아 바로 퇴근을 했다. 그 날이 금요일이었고 주말동안 열이 펄펄 끓어 다음 주 월요일 날 연차를 냈다. 그렇게 3일간을 꼬박 앓아눕고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지독한 공황의 시작이었다.
너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부르는 목소리도, 매일같이 수두룩하게 쌓이는 공문도.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 할 것 같았다. 내가 작성한 공문은 행정실의 확인을 거쳐 본부로 올라가 최종승인이 나지만,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모두가 내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네모반듯한 파티션 너머로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공무원 세계에서 책임이란 연차와 직급이 높은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권한도, 힘도 없는 말단 직원에게 오물처럼 부여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식 공무원도 아닌 말단 계약직인 나 같은 사람에게. 내가 가장 만만하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분풀이해도 아무 뒤탈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가 그렇게 비겁하고 수치심을 주는 방식으로 내게 모욕을 주었을 때 모두가 침묵했던 거겠지. 성가신 일에 연관되기 싫고 불똥이 튀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너의 잘못으로 하자, 너 하나만 잘못한 것으로.
이 사무실에 내 편인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일을 도와줄 사람도, 같이 책임을 져줄 사람도 없는 거구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도 나는 완전히 소외된 채 혼자구나
혼자구나.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결국 나는 철저히 혼자라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책임과 비난은 오롯이 나에게 돌아올 거라는 사실은 나를 반쯤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더 이상 사무실의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섞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려고 할 때면 손과 발, 무릎, 온 몸의 장기가 벌벌 떨렸다. 저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할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그래서 나를 비난하려고 그러는 걸까. 시야가 흐릿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돼 상대방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떠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꾹 말아 쥔 손에서는 땀이 흥건하게 베여 나왔고 심장은 항상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터질 듯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면 화장실에서 몸을 옹송크린 채 주먹을 꽉 쥐고 떨림이 잦아들 때가지 기다려야 했다.
업무 효율도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글자가 읽히지 않아 같은 공문을 몇 시간에 걸쳐 이해하고 서너 차례 확인을 마친 뒤에도 강박적으로 다시 내용을 점검했다. 그러고도 집에 가서는 혹여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나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게 되지는 않을지 불안해하며 새벽까지 나쁜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정신과에서 받은 공황장애 약과 진정제를 매 시간 먹으며 일을 해야 할 정도에 이르렀을 땐 더 이상 음식물을 삼킬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한 달 만에 8kg이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약만료일까지 남은 3달을 다 채우고 나갔다. 여기가 살아있는 지옥이구나, 매일 매순간 피부를 뚫고 뇌를 마비시킬 정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도, 공황발작이 와 한밤중에 응급실에 실려 갔으면서도 나는 후임자가 구해지고 정식임용이 될 때까지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3년 같았던 마지막 3개월을 이 악물고 버텨(말 그대로 이를 악물고 일을 해서 치아가 손상됐다) 끔찍이도 지난했던 일 년치의 노동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퇴사를 한 지 한 달여 만에 나는 다시 원고지 앞에 설 수 있었다. 그제야 이야기를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용기가. 그러니까 이 서사의 끝에서 내가 발견한 사실은 이런 것이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때로는 책임감을 버리고 비겁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태가 심각했음에도 당장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던 건 퇴직금도, 경력문제 때문도 아니었다. 알량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내년 전체 사업계획서와 예산문제, 신임교수 공채 등 굵직하고 첨예한 업무에 발을 끼고 있었고, 사수가 없어 혼자 일을 쳐내야 했다. 내가 맡은 업무의 정확한 프로세서와 시스템 사용법, 행정절차 등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었으므로 내가 여기서 발을 빼면 다른 사람이 귀찮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 학과와 행정실, 본부 쪽에 업무마비가 올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모든 것이 불 보듯 빤한데 모든 걸 나 몰라라 하고 나올 수는 없었다.
허나, 지금 돌이켜보면
책임감,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눈 밑이 움푹 파이고 잇몸이 내려앉을 정도가 되어서도 그까짓 책임감 운운하며 도망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개병신 호구새끼일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까지 나는 나를 일순위로 두지 못하는 걸까. 내가 무슨 대통령도 아니고 지켜야 할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자랐길래 스스로에게 이렇게 형편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사람이 제정신으로, 사지 멀쩡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나.
이제껏 줄곧 책임감 있는 어른이 돼야 한다고 배웠다.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다 하는 것이 어른의 조건이자 의무라고. 학교에서도 주변 어른들도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어. 그런데 그게 진실일까. 그 책임감이라는 걸 머리에 이고 있다가 내 목이 부러진다 해도?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회사에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히든 다른 사람이야 좆 되든 말든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스스로를 위해 책임감 따위는 버리고 도망칠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인가, 비겁해져야만 하는가. 그걸 판단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키는 어른이다. 두 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고 있다간 종내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어쩌면 사람 내면에 잠재된 이기심과 비겁함, 비굴함 따위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책임감은 상황을 타개하고 주변사람들을 살리지만, 반대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본인의 삶과 정신을 망칠뿐인 책임감도 있다(그런 책임감은 아집이고 아둔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건 모든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를 기르는 것임을.
그리고 또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바로 일은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5년 뒤 10년 뒤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고 할 때면, 항상 반듯한 옷차림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정돈된 자리에서 모니터를 보며 일하는 형상을 그렸다. 4대보험이 보장되고, 음식을 고를 때 가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월급을 받고, 더울 때 시원하고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인문사회계열 대학을 졸업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당연하다는 듯 화이트칼라 직군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원 시간강사로 일하는 모습 따위는 결코 없었다. 그래서 대학졸업 후 내가 바라왔던 사회인의 모습을 실현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해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대학생 시절 마트에서 상품을 팔거나 식당에서 서빙하던 것, 학원 시간강사로 일할 때의 모습이었다. 고용계약서 하나 없이 적은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하루 온종일 허리를 굽히거나 서서 일할 때의 모습. 그렇지만 두 다리 뻗고 마음 편히 잘 수 있었을 적. 출근길이 지옥 같지도, 하루하루 일에 대한 공포로 눈에서 물이 비집고 나오지도, 퇴근하고서도 일 생각에 명치끝이 아릿하게 저려오지도 않았던 때.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간이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 일상.
그 사실을 깨닫자 일은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방법과 일 외에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분야는 많다는 자각. 실제로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 적, 몸이 고되고 돈 때문에 종종 서러웠지만 그 때에도 나는 스스로 월세와 생활비를 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글을 쓰며 살았다.
실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기대, 타인과의 비교를 내려놓는다면 화이트칼라나 정규직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까 못 먹고 못 자고 삶과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버텨야 하는 게 일의 본질일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원에서 시간강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 또한 기꺼이 내가 꿈 꿀 수 있는 삶의 한 가지 선택지로 남겨두었다.
한 달 전 쯤 인가, 현대자동차 팀장급 디자이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자신이 디자인한 신차 발표 8일을 앞두고. 그 전에 그는 심각한 공황장애와, 조울증, 우울증으로 병가를 내고 휴직기간을 가졌지만 복귀일이 다가올수록 병세는 점점 악화됐고 한다. 결국 복귀 한 달을 앞두고 영영 먼 길을 떠났다고. 평소 그는 밤샘 작업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으며 주말, 휴일 할 것 없이 일을 했다. 자신이 죽으면 묘비에 ‘죽어라 일만하다 간다’는 말을 적어 달라 부탁할 정도로 그 정도로 그는.
혹자는 그 지경이 되면서까지 왜 일을 그만두지 않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는 두 아이를 둔 가장이자 대기업의 책임연구원이었다. 한낱 대학교 행정 계약직에 먹여 살려야 할 식솔이 없는 나조차도 책임감과 생계의 무게에 눌려 자의로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는데 그는 오죽했을까. 그가 느꼈을 책임감과 부담감, 압박감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가늠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자신만 바라보는 아내와 아이들, 끊임없이 내려오는 상사의 지시와 밀려오는 실적압박, 그에 고스란히 영향을 받는 팀원과 하청업체들, 당장의 생계.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궁지에 몰린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하며 오로지 머릿속에 죽음만······ 그저 죽어서 이 모든 상황을 다 끝내고 싶다 죽음으로써 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지만 그럼에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그의 죽음이 안타깝고 한 인간을 일로인해 죽음에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 사회에 화가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것을 묻고 싶다
그러나 그 무엇이, 당신의 숨의 무게만큼 무거울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