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주 오랜만에 밖에 나왔다.
주말 오후 2시의 공기는 가늘가늘하고 폭닥하다.
매섭던 추위가 한껏 움츠러들고,
어느 새 봄이 왔나보네.
주위에 롱패딩을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걸 보니 진짜, 봄이구나.
딸기를 한소쿠리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싱그럽고 탐스러운 딸기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기분이 좋다.
퇴사를 하고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퇴사와 동시에 지독했던 공황장애도 막을 내렸지만 나는 여전히 땅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죽은 듯 보냈던 시간이 길어서일까. 육신이 진짜로 죽어버렸다고 뇌가 착각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 욕구가 들지 않는다. 나를 내내 괴롭히던 불안도 초조도 공포도 걱정도 사라졌지만, 그 외의 모든 것도 없어졌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사람이라면 응당 품고 있을 ‘~하고 싶다’와 ‘~해야 한다’는 욕망, 또는 긴장감이 전혀 없다. 그토록 사랑했던 책도, 글도 이제는 마음에 없다. 어디에 가고 싶지도, 누구를 보고 싶지도 않다. 심지어는 뭐를 먹고 싶다거나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침대에 누워있다 하루 내내. 왜 몸을 일으켜야 하는지 모르겠어. 밥을 왜 먹어야 하는지도. 덕분에 몸무게는 40키로까지 빠졌고 피부와 머리카락은 바스라질 듯 푸석거린다. 입술은 꺼칠하게 말라붙었고. 거울에 비친 눈은 항상 흐리멍덩하고 지쳐 보인다. 낮에는 머릿속이 몽롱하여 병든 닭처럼 눈만 껌뻑거리고 있고, 밤에는 무서울 정도의 불면에 시달린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아보지만 20분 간격마다 경련하듯 잠에서 깬다. 번개가 뇌리에 번쩍하고 꽂히는 느낌에 몸서리가 쳐진다.
오늘 밤도 자기는 글렀다. 그러면 나는 뭘 하느냐. 브런치를 켜서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읽는다. 아, 전에 나는 이런 표현을 생각해낼 수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의 연결고리를 엮어 문단을 이어나가고 메시지를 전달했구나. 일상에서 찰나의 순간을 움켜쥐어 한 편의 글로 엮어낼 수 있는 성찰과 사고력과 집요함이 있었구나. 이제 나는 무엇에도 집중하기 힘들다. 한 가지 생각을 오랫동안 할 수가 없다. 뇌의 한 부분이 무언가를 영영 상실한 것만 같다. 그게 나는 조금 두렵다. 내가 다시는 좋은 글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지 못할까봐서, 나는 그게 조금 두렵습니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그 밤에는 너무나 아연해서 그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크게 뜬 채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러나. 그토록 원했던 퇴사를 했고,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바닥에 엎어져있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 상태가 이어질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 왜 아직 내 지옥은 끝나지 않았나. 그런 생각들이 침대 아래로 쏟아져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 문장을 떠올렸다.
언젠가 읽었던 오래된 문장이 모든 상념을 뚫고 선명하게.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몇 해 전 읽고 핸드폰 속에 저장해 놓았던 글귀를, 야심한 새벽녘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방안에서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언젠가 네가 그만 살고 싶은 듯한 얼굴로 나를 봤던 걸 기억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네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는데 고작 내 바람만으로 네가 살아서는 안 되잖아. 살아가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어야 하잖아. 울다가 잠든 네 모습을 한참 봤어. 아침이면 일어나고 싶은 생을 네가 살게 되기를 바랐어. (중략) 그리고 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되었어.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한 생에서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 좌절이랑 고통이 우리에게 믿을 수 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니까. 그러므로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다시 태어나려고, 더 잘 살아보려고, 너는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느라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일지도 몰라”
_이슬아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이 생에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곤 했다. 몸에 병이 와 일 년 간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과 자아마저도 파쇄 되었을 때, 지독한 우울증으로 머릿속에 오로지 ‘죽음’밖에 떠올릴 수 없었던 때, 모두의 시선이 두려워 내딛는 걸음걸이마저, 내쉬는 숨조차도 죽여야 했을 때. 그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서 나는 꼭 다시 태어났노라고.
영영 고장 나 있을 것 같았던 육체는 회복됐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진 중 하나로 남을 유럽여행을 떠났다. 한때는 한 달 내내 집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철장 없는 감옥 속에 갇혀 살았는데, 이제는 한국의 반대편에 위치한 저 너머의 나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의 가장 낡고 고루한 껍질이 벗겨졌다. 그 계기로 글을 쓰게 됐고, 내내 바라왔던 잡지사에서 글을 쓸 기회도 얻었다. 우울증으로 모든 삶에 대한 의지가 저물었던 적도 있지만, 그 끝에서 나는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하고 가만가만한 일상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글을 써 결국 출간에 성공했다. 억울함과 가혹의 시간을 버티는 법을 배우고 인간관계에 대한 담담하고 무던한 시선을 정립하게 됐다.
그때마다, 모진 나날들 뒤에 오는 어슴푸레한 새벽하늘과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나를 조성하고 있던 내면의 성분들이 조금씩 뒤틀리고 변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을, 주위를 감각하는 시선과 가치관, 타인과 나를 대하는 태도, 정답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이 허물어지고, 전에는 더 없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두 손으로 내려놓게 되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새로워진 정체성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났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기다리는 중일 테다.
지쳐 쓰러져가는 게 아니라,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뒤쳐진 채 그 자리 그곳에 고여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내가 마주할 결말은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는 장면이 아니다. 새롭고 깨끗한 바람이 이마에 닿아 시원하게 움을 트는 모습이다. 그런 바람을 기다리며 지금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려니.
다시 태어나려고, 잠시 멈춰 있을 뿐.
믿을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정체성과 마음을 쥐고, 나도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