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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Apr 19. 2022

겨우 이 정도의 봄


인근 산에 꽃구경을 갔다. 활짝 만개한 하얗고 파랗고 분홍한 여린 잎들을 보니 진짜 봄이구나, 실감이 났다. 겹겹이 덧대져 살랑이는 분홍색 가지들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풍경을 몇 살 때 봤더라면 가장 아름다웠을까.’ 언젠가 내게도 이 봄이 완전하고 온전하게 느껴졌을 때가 있었다. 파란 하늘도, 나부끼는 분홍빛 바람도, 여린 꽃잎아래 부서지는 햇살도, 지저귀는 새들도 더없이 충만하게 느껴졌을 때. 너무도 선명하고 아름다워 더할 나위가 없었을 때.


지금 이 풍경을 보고 있는 나는 조금 슬프다. 

조금 슬프고 그립고.


실은 봄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점점 따뜻해져가는 날씨도, 움을 트는 싹들도 부정하고 싶었다. 애써 봄바람에 섞인 찬 기운을 느끼며 봐, 아직 봄이 아니야, 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사람들이 두꺼운 옷을 벗고 거리로 나오는 게 싫었다. 마스크 위로 번지는 그들의 들뜬 마음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 겨울은 아직 가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직 앙상한 가지 아래에 머물러 있으니까.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하고 웃고 봄을 반기고 앞으로 나아가고. 그런 게 싫었다. 내가 더 초라해지니까. 쓸쓸해지니까. 혼자인거 같아서.


개인적인 문제로 아직 터널 속을 걷고 있다. 이 터널은 춥고 어둡고 축축하고 방향성이 없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터널 밖에는 벌써 봄이 와버려서, 꽃이 만개해버려서. 터널 속에 있는 나는 터널 밖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농도로 이 계절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꽃을 보고 있는데도 슬펐다. 다른 사람들에겐 100퍼센트의 봄이, 그리고 언젠가 내게도 100퍼센트였을, 온 몸을 가득 채웠을 봄이, 지금의 내겐 기껏해야 30퍼센트 정도라서. 딱 발목만큼만 차오르다 거기서 멈춰버려서. 나는 그것이 서글펐고. 겨우 이 만큼의 봄, 겨우 이 정도의 봄이구나, 하고.


그런데, 그럼에도. 또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게 또 얼마간 예뻐 보였다. 공기가 어느새 춥지 않을 만큼 데워졌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고, 어쨌든 나는 이것을 보려고 춥고 작은 방에서 나와 여기에 도착했구나, 그러니까 이 풍경 속에 나도 존재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아. 이 봄이 나에게 충분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고. 겨우 이 정도의 봄, 겨우 이 만큼의 봄일지라도 충분하다고. 꼭 끝까지 차올라야 충분한가. 내가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 봄이 겨우 30 퍼센트일지라도, 간신히 발목까지만 차올랐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도 여전히 봄이 있고, 꽃잎이 있고, 내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누릴 수 있는 몫이, 이 풍경 속에 남아있다.



실은 알고 있다. 이 봄을 온전하게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각자 저마다의 사정으로 얼마간 쓸쓸한 필터를 덧씌운 채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적인 문제로 또는 외적인 환경으로, 사람 때문에, 일 때문에. 누군가의 시야에는 채도가 낮은 필터가, 또는 금이 간 필터가, 어쩌면 흑백필터가 덧씌워져 있을지도 모르지. 나처럼 간신히 봄의 파편만을 붙들고 다시 침대로, 일상으로, 직장으로, 해결되지 않은 환경 속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 어딘가 구겨지고 얼룩진 봄을 맞이한 사람들.


그래도 나는 그 사람들이 충분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겨우 이 정도의 봄일지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면. 왜냐하면 나는 이제 내가 닿을 수 없는 것들에 초점을 맞춘 채 낙심하고 싶지가 않아서이다. 그러다가 내가 쥘 수 있는 것들조차도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싶지가 않다. 지금 내게 허락된 것들을 허락된 만큼만, 붙들고 있고 싶다. 좀 모나고, 슬프고, 흐릿하면 어떤가.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봄날만큼만, 묻어있는 아름다움만큼만 이라도 손에 쥐고 싶다.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그것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만히 누리고 싶다. 그리고서 스물여덟의 봄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50퍼센트의 봄을, 80퍼센트의 봄을, 어쩌면 머지않아 반듯하고 온전한 봄을 소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원래 봄이라는 게 계절이라는 게, 인생이라는 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순환하고, 오르내리고, 꺼졌다 켜졌다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겨우 한 자락의 봄일지라도 썩 나쁘지 않다고 여기겠다.      


어떠니. 이 정도면 썩 괜찮지 않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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