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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Jul 13. 2021

빗물이 내리면 눈물이 흐르는
사연 하나쯤


“걔는 가정환경도 좋아, 부모님 직업도 좋아,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저렇게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만 더럽게 센 배배꼬인 인간이 됐는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사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슬쩍 앞머리는 매만지며 답했다     

“음, 그래도 모르지··· 겉으론 마냥 멀쩡해 보이더라도 무슨 일을 겪었을지는···.”

사람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있을 거라는 나의 답변에 친구는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그건 그렇지···.” 라며 우물거렸다.


전에 건강이 많이 안 좋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매일 밤 자정 쯤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며(무슨 청춘만화 여주인공도 아니고....) 부러움과 좌절감을 느끼곤 했다. 지긋지긋하고 환멸 나는 일상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나는 저 사람들처럼 될 수 없을 거라는 좌절감. 매일매일 비행기를 보며 하루하루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일 년 후, 건강이 많이 좋아지고 나서 네덜란드로 교환학생을 갈 기회가 생겼다. 나는 그때 중국을 경유하여 밤 열두시에 출발하는 가장 싼 비행기를 예매했다. 베이징에 10시간 넘게 체류하는 코스였기에 출발하기도 전에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고,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의 공항에 홀로 덩그러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급기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돈이 많아서 직행 비행기로 낮 시간에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어라, 싶었다. 이거 그거 아닌가? 내가 옛날에 매일같이 부러워했던 밤비행기?

그렇다. 내가 그 시절 매일 부러워했던 비행기는 사실 자정에 출발하는 가정 싼 중국비행기였던 것이다! 여기 타는 사람들은 모두 돈이 많아 룰루랄라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보려고 가장 안 좋은 시간에 출발하여 어딘가를 경유하여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상기하자마자 아, 정말 막상 그 상황에 놓여 있어 보기 전까지는 절대 그 상황과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거구나, 깨우쳤다. 마냥 부러워하던 낭만적인 밤비행기의 이면에 이런 슬픈 사실들이 숨어 있었다니.


또 이런 적도 있었다. 내가 취업준비생이었고, 친구는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친구와 통화를 하며 서로의 고충을 나누고 있었다. 친구는 일을 하고 있지만 계약직으로 인한 고용불안정성 때문에 몹시 불안해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또 어디로 취직을 해야 할지, 회사를 나오기 전에 자격증 하나라도 더 따서 이직할 때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퇴근하고 나면 너무도 힘이 없고 무기력하여 자꾸 공부를 미루게 되고 그런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라고도 했다. 자려고 누우면 9평 남짓한 이 원룸에서 자신의 인생이 멈춰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고.


나는 친구를 위로하면서도 모순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너는 취업은 했잖아. 돈을 벌고 있잖아. 그러면서 그 친구보다 내 처지가 더 딱하고 힘들다고 느꼈고, 지금 당장 신분과 소속이 보장된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계약직으로 일해 보니 정말 하루하루가 초조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나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빨리 나만의 커리어와 스펙을 더 쌓아야 할 텐데, 또 이직준비는 어떻게 하지 등등의 걱정으로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끝이 있는 직장생활은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친구가 수화기 너머로 토해내던 불안의 깊이와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는 친구를 마냥 부러워하기만 했었는데. 정말 뭣도 모르면서 그랬구나.



예전에 술자리에서 ”아무리 원수 진 사이여도 포장마차에 앉아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종내엔 어깨를 끌어안고 울게 된다.”는 얘길 들은 적 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젠 그것이 감춰진 사연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겠다. 

(중략)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고. 

외로운 우리가 조금 덜 외로워지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상대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토록 많은 일들이 겹겹이 일어난 것처럼, 그 시간들이 포개지고 포개져 지금의 내가 된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렇다. 지금의 그를 이룬 크고 작은 일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종내는 우리를 끌어안고 울게 할지도 모를 사연이.


-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中-



그렇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나는 이 두 경험을 통해 그 무엇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느꼈다. 함부로 동정하는 것은 물론, 함부로 부러워해서도 안 되겠구나. 상대방의 처지에 놓이기 전까지는 절대 그 상황과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거로구나. 내가 부러워했던 밤비행기와 친구가 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행복하고 안락한 상황이 아니었듯이.


그래, 나도 이제 스물일곱의 해나 먹었으니 알아야 한다. 누군가를 함부로, 속편하게 재단해서 부러워하거나 불쌍히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대신 그 에너지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는 나의 사연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사연이,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 것.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고.




+ 오늘의 날씨를 누가 믿느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지 말아요.

  빗물이 내리면 눈물이 흐르는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_10cm <10월의 날씨> 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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