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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Jun 08. 2021

‘권력없음’을 혐오함으로써
권력없음 증명하기


“직장에서 울어 본 적 있어요?”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주인공은 이런 질문을 받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 적 없다고. 나라면 솔직하게 말했을 거다. “네 무척 많아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겠지. “그리고 최근에도 진짜 오랜만에 직장 때문에 울었어요.”

실은 며칠 전 상사의 싸이코패스적인 성격과 모욕적인 발언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이야기를 해보자면, 당시 나는 논문의 연구책임자를 조사하는 일, 그러니까 논문을 집필한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교수님, 이 논문의 연구책임자이신가요?”라고 반듯하게 묻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나는 현재 대학 행정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한 교수님께서 굉장히 띠겁게 “거기 뭐라고 적혀있는데요” 라고 말했고, 나는 약간 기가 죽어 “C.A 라고 적혀있는데요....” 라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이 한 층 더 퉁명스럽게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라고 되받아쳤다.


그런데 C.A가 뭔지 알 길이 없는 나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런데 C.A가 뭔지....” 교수님은 한숨을 아주 크게 하, 쉬더니 한글자한글자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C.A는 교.신.저.자라는 뜻입니다. 이제 됐죠?” 교수님은 왠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되긴 뭐가 돼 교수님. 내가 대학원생도 아니고 논문도 한 번도 안 써봤는데 교신저자가 뭔지 알게 뭐야. 그래서 말꼬리를 흐리며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저...그럼 연구책임자가 아니시라는 말씀이신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말을 이을 수 있었던 건. 왜냐하면 교수님이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 아니 소리쳤거든.


“야!!!!너 도대체 왜 그래???!!!!!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나는 순간 귀가 얼얼해질 만큼의 고성에 약간 넋이 나갔었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단어를 잘 몰라서.....” 그러자 교수님이 더 크게 소리쳤다. “모르면 노력을 해야지, 너는 노력을 안 해, 노력을 안 한다고!! 네가 하는 일 전부가 그렇잖아 지금!!!” 그 뒤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됐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신경질적인 음성을 끝으로 폭력적인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나는 결국 그날 한참을 울다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그냥 ‘네’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 꼭 그렇게 말꼬리를 잡아서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을 쥐새끼마냥 구석에 몰아붙였어야 했나. 교신저자 하나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모욕을 당했어야만 했던 걸까. 그리고 노력을 안했다니. 입사하고 두 달 동안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혼자서 업무를 익히느라 얼마나 고군분투했는데.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발바닥에 땀이 배도록 열심히 했다고. 그런데 노력을 안했다니.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다니. 교수 당신이 뭘 안다고 그리 말해.


나는 그날의 일이 너무 억울해 후에 정신과의사에게 이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알려주었다(나는 현재 우울증으로 정신의학과를 다니고 있다). 선생님은 가만 듣더니 딱 이렇게 첫마디를 꺼내셨다.


“그 사람, 나이 어리죠?”


나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절대적으로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다른 교수들에 비해 훨씬 젊은 나이였다. 선생님은 알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원래 권력이 없고 자기 입지가 불안한 사람일수록 남들을 깔아뭉개고 모욕을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확인하려고 그래요. ‘나는 네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걸 보여주려는 거죠. 그런데 예란씨. 만약 예란씨가 그날 당일 나한테 왔다면 난 예란씨 손잡고 바로 경찰서 가서 직장 내 갑질로 신고 했을 거예요.


자기가 월급 주는 사람도 아닌데, ‘야’, ‘너’ 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니,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많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예란씨는 그냥 참고 넘어갔지만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이 갑질하며 모욕을 줄 거고, 그러면서 ‘자신은 그래도 된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럴 수 있는 위치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할 거라고요.


선생님의 말을 듣자 언젠가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되레 권력 없는 상태를 혐오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없음을 부정하고 권력을 숭배한다는 요지의 글을. 그리고 그 권력없음에 대한 혐오는 곧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고. 그게 바로 노동자계급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매커니즘이라고 했던가.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 교수가 자신보다 낮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고 모욕을 주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본인이 가진 권력이 없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납게 굴면 굴수록 그의 권위와 입지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밑천과 약함이 드러나는 꼴이라고.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가만 생각했다. 세상에는 참, 찌질한 인간들이 많다고.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상대에게 모멸감을 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사람들.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해야 할 텐데. 그때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얼 할 수 있을까.


언젠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당차고 냉철하게 그들의 무례함을 신고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 무뢰한들이 다른 사람에게 다시 떵떵거리지 못하도록.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아직은 내공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행위를 유심히 쳐다본 뒤, 나는 절대 저런 어른이 되지는 말아야지, 스스로 권위 없음을 드러내는 인간이 되지는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나의 권리를 씩씩하게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될 날이 오겠지.      

마지막으로 그런 무뢰한들과 나 자신에게 동시에 읽어주고픈 구절이 하나 있다. 바로 이윤주 작가의 저서 <나를 견디는 시간>에 나오는 말이다.


“성숙해지자." 

"나만 성숙한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도 성숙해지자. 세상 환멸 나는데 나 하나 성숙해서 뭐 달라지나 싶어도 성숙해지자. 사방 천지가 육갑하고 자빠지고 트위스트 추는데 나 혼자 성숙한 게 무슨 멍청한 짓거리인가 싶어도 성숙해지자. ‘그지깽깽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강강술래를 하는데 그 속에서 문득 성숙하다고 야심에 UFO가 내려와 나를 격리해줄 리도 없지 않나 싶어도 성숙해지자.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데 엿으로도 안 바꿔주는 성숙은 개뿔, 내가 너만큼 지랄을 할 줄 몰라 안 하는 줄 아느냐 싶어도 성숙해지자. 그 새끼들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꽃들에게 민망할까 봐 그런다. 느닷없이 피어버린 꽃 더미가 소매치기처럼 스치는 날 부끄러워 죽지 않으려면, 성숙해지자. 

홀로, 따로, 외로이, 나직이 성숙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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