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말고요, 권력이요.
짜증. 마음에 꼭 맞지 아니하여 발칵 역정을 내는 짓, 또는 그런 성미.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어른이 가진 형상 중 하나. 상황과 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덩어리를 상대방에게 마구 쏟아내는 모양새. 특정 대상의 언행이나 특수한 상황에 대해 발생하는, 감정의 출처가 명확한 ‘화’와는 달리 발화자의 내적요인, 상대방의 언행과는 무관한 환경적 요인이 뒤엉켜 발생하는 것. 사실은 이미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한데, 누가 다가와 톡 건드리니 별것도 아닌 일에 크게 반응하게 되는 거일지도. 그래서 종종 상대방을 더 당황스럽고 빈정 상하게 만들곤 하지. 자, 여기까지.
이만 짜증에 대한 ‘나’의 상념들을 마칩니다.
띠로링.
하하. 갑자기 웬 짜증에 대한 상념이냐고 묻는다면, 최근에 요 감정에 대한 고찰점이 하나 더 늘었기 때문이다. 바로 “짜증은 상사의 권력이다”라는. 이 명제는 어느 날 갑자기······ 는 아니고 회사에서 겪은 2개의 일화를 거쳐 필연적으로 내게 참인 명제로 거듭났는데.
상사: 예란, 잠깐. 이번 주에 보도자료 나갈 거 이거 하나인가?
나: 네, 이번 주는 00건 하나만 나가고, 다음 주부터 이러이러한 순서대로 나갑니다.
상사: 아니이이이~~~~~~ 이번 주에 이거 하나만 나가냐고!
나: ......? 네, 이거 하나만 나갑니다.
아마 상사는 나의 첫 번째 대답에서 앞부분은 못 듣고 뒷말만 귀에 담았으리라. 그리고 나를 부르기 직전 걸려온 전화로 인해 이미 그의 신경이 곤두선 상태라는 것도 나는 눈치 채고 있었지···.
그래, 안다 이거야. 그럴 수 있다 이거야. 그런데·······
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는 별개로 당시 나를 지배하는 건 이런 생각들이었다.
‘왜 나한테 지랄이지?’
처음에 분명히 이번 주에 나가는 건 00건 하나라고 묻는 말에 대답했잖아. 자기가 제대로 안 들어놓고 왜 나한테 갑자기 짜증이야? 아니, 설사 내가 묻는 말에 답을 제대로 못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게 그렇게 짜증낼 만한 일이야?! 어?!
(출판물 교정, 교열 본 내용을 상사에게 보고하는 상황)
나: 그래서 이 부분은 이렇게, 저 부분은 저렇게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저··· 그런데 아직도 괄호 기호가 통일이 안 되어 있어서···
상사: 아!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오오오오오오!!!!!!!
나: ······· ·······
그래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그런 거 하나도 안 중요하다는 거. 그 부분에 소괄호를 쓰든 꺽쇠를 쓰든 무슨 상관이야. 내용에 오류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기호통일 관련해서 계속 문의가 오는데 어떡해. 이유야 어쨌든 타 팀으로부터 몇 차례 지적된 내용이니 나는 당신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는 위치인데. 당신에게 최종 컨펌을 받은 후에 나는 당장 디자인팀에게 이 원고를 전달해야 하고, 전달할 때 수정사항과 방향을 정리해서 짚어줘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뭐 어쩌라고, 뭘 어쩌자고!
후. 일단 위 사단(?)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설명을 조금 덧대야할 듯싶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때는 회사 출판물 마감이 코앞앞앞 까지 다가온 어느 날. 당장 다음날 오전까지 교정교열을 마친 최종 원고를 디자인팀에게 넘겨야 했기에 나와 상사는 불꽃야근을 하고 있었더랬다.
10시가 조금 넘어갈 무렵이었나. 드디어 각 팀의 검수를 끝낸(해당 출판물은 각 팀의 관계자들에게 팩트체크 및 수정사항, 오류 등을 꼼꼼히 검수 받아야 하는 내용이었다.) 2차 교정본의 수정사항을 상사에게 보고할 차례가 왔다(!)
이거만 끝나면 ‘도비는 자유예요!’를 외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찰나, 아차. 아직 풀리지 않은 미제가 하나 남아있었구나. 내용인즉슨 섹션 소개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괄호기호의 형태가 아직까지 통일되지 않았다는 건데(소괄호와 꺽쇄가 혼용되어 있는 식으로)····.
1차 교정을 볼 때 누군가로부터 이에 대한 지적을 받고 해당내용을 상사에게 보고 한 바 있으나, “음, 별로 안 중요한 사항이긴 한데····. 일단 내가 나중에 정리할게” 라는 답변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2차 교정과정에서도 타 팀으로부터 몇 차례 언급된 내용이었기에 이번에 보고할 때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지, 생각했다. 그래, 그랬을 뿐인데······ 저렇게 엉망진창 결론이 날 줄은.
당시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단전에서부터 처 올라오던 서러움과 수치심(그날 몇몇의 다른 팀들도 같이 야근을 하고 있었기에)을 500ml 생수병 원샷으로 도로 삼켰던 기억이 난다. 그 와중에 마지막으로 원고를 다듬고 업무메일을 쓰고 먼저 퇴근하는 상사에게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봬요~!” 인사를 했다. 그리고 12시가 다 되어서 택시를 탔고··· 그제야 눈물이 나더라고.
상사는 연이은 야근에, 밀어닥치는 업무에, 오늘도 자택으로 향하는 마지막 전철을 탈 수 없다는 좌절감에 쌓여있던 감정쓰레기들을 빽 내지른 거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이미 한계치였다고.
‘짜증은 상사의 권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위 사례에서 봤듯 상사는 자신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어떤 감정이든 원하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사원에게 쏟아낼 수 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만, 가능한 일이다.
허나 그 역은 불가하다.
사원은 현재 심신의 상태가 어떠하든, 이전에 무슨 일을 겪었든 상사에게 역정을 낼 수 없다. 심지어 ‘내가 당신의 짜증으로 인해 기분이 매우 구리다’는 티조차도 낼 수가. 당시의 내가 마음속 괄호 안의 말들 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것처럼.
그래도 사람이면 누구나 짜증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고, 그걸 참아내기 힘든 순간이 있지 않느냐고. 그럼, 당연하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다 짜증을 낸다. 당장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만 해도 화려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날이나 컨디션이 똥망일 때면 한껏 인상파가 되곤 하니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 순간 짜증을 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불같이 감정을 터뜨려 놓고선 돌아서면 아무 일 없다는 듯 하하호호 말을 건네는 사람들. 기분이 나아지는 즉시 ‘그 일’ 자체가 머리에서 휘발돼버리는 것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부딪힐 때면 혼자 끙끙 앓았던 시간이 억울하기도 하고 속이 부글거리기도 한지만, 무엇보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될 거라는... 그러니까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람은 실수와 반성과 다짐과 노력을 끊임없이 되풀이한 후에야 겨우 한 발짝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인데. 본인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게 뭐가 문제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데 무얼 어쩌랴. 어쩌면 평생 [짜증폭발 = 권력남용] 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타산지석 삼을 수밖에 없으려나.
언젠가 “어쨌든 리더는 리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윗사람이 폭군이라거나 범법행위를 저질러도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참아라, 라는 뜻은 절대 아니고. 어찌되었든 리더를 선정하는 첫 번째 기준은 ‘능력’이니, 리더라고해서 꼭 인성적으로 번듯해야 하는 건 아니며 독단적이고 성질머리 더러운 리더도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회사상사의 첫 번째 조건은 ‘업무처리 능력’이다. 팀원들의 전체 업무를 핸들링 하면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회사에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인가. 애초에 업무성과와 결과 따위로 승진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려니.
하지만 이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인성과 도덕성에서 볼품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동료와 사원들에게 있어 절대 ‘함께 일하고 싶은 상사’는 아니라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다름없음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뛰어난 두뇌와 탁월한 판단력으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얻은 천재 사업가, 스티브잡스조차 괴팍한 성미와 성격파탄적인 면모로 인해 많은 지인과 동료와 회사직원들의 외면을 받았던 것처럼.
그러니 훗날 누군가의 상사가 될 우리네들도 지금부터 부단히 ‘감정컨트롤 훈련’을 하며 짜증과 화에 대한 역치를 조금씩 높여가야 한다. 말하건대,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인지하고 조절하는 능력은 일을 잘하게 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공을 필요로 한다. 이미 상사의 신분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행보를 뒤돌아보는 게 그 첫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자꾸 남에게만 뭐라 하는 것이 민망하여 2020 여름의 나에게도 한마디 덧붙여보련다.
- 이런 글을 구상하고 쓴 것만큼, 스스로의 언행에 더욱 유념을 가하는 사람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