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굷, 그 강렬한 두글자는 내 뼈 어딘가 들러붙어 나를 서서히 좀먹어갔다
날씬함에 대한 약간의 강박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날씬’이 미의 기준인 세상에서 누군들 날씬해지고 싶어 하지 않으랴.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그에 대한 집착이 좀 더 심한데, 왜냐하면 나는 키가 작으므로. 153센티에 살집이 있으면 짜리몽땅해 보이잖아 사람이. 그래서 종종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볼 살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체크하고, 허벅지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한다. 살이 쪘다고 판단되는 즉시 식이요법과 운동에 돌입한다. 이 흐물거리는 팔뚝을 보고도 밥이 넘어 가냐 인간아, 어서 아령을 들란 말이야!
스물일곱, 외모에 대한 많은 부분을 내려놓은 지금(나는 쌩얼로 회사나 백화점에 갈 수 있는 배짱이 있다)까지도 유독 ‘살’에 관한 것에는 너그러워지질 않으니. 고작 1키로 차이로 자존감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널뛰기를 하니 앞으로의 삶이 심히 걱정된다. 하지만 이런 강박이 개인의 문제라고 하기엔 주위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꽤 본지라. 폭식증 같은 식이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부터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몹시 우울해지는 사람, 극단적으로 식사량을 줄이고 끊임없이 몸무게를 재는 이들까지.
그래,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날씬한 몸을 비이상적으로 추구하는 현상의 배후에는 분명 어떤 음모가 있을 거야. 말하자면 사회의 악습이라든지 병폐라든지···.
그리하여, 오늘은 이 숨겨진 것들을 밝혀내기 위해 나의 날씬함에 대한 강박의 역사를 되짚어보려고 한다.
일단 시작은 열다섯. 열다섯 전까지의 나는 스스로를 통통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다. 뚱뚱하지도 날씬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몸, 키 153에 몸무게 46키로. 그런데 어느 날 친구로부터 “너 팔다리가 꼭 소시지 같다 통통해서.”라는 말을 듣게 되고, 그때 처음으로 ‘통통함의 기준’과 나의 체형을 비교해 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세상에는 ‘미용 몸무게’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수치를 정리한 표에 따르면 나의 체중은 정상에 속하되 ‘아름다워 보이는’ 무게는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됐다. 아, 나 정도면 통통에 속하는구나!
그리고 해가 흘러 열여섯의 어느 여름날, 학원의 남자 선생님이 “예란이는 짧굵이지”하고 내게 ‘장난’을 건넸다. 짧고 굵다. 짧굵. 나는 그때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상황을 넘겼지만 속으로는 선생님의 말에 수긍했다. 사실이지 뭐, 키도 작은데 살까지 올라 오동통하지 나는. 화가 나지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게 사실이니까 그런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정말로 괜찮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짧굷, 그 억양만큼이나 강렬한 두 글자는 나도 모르는 새에 내 뼈 어딘가에 척, 들러붙어 나의 심신을 서서히 좀먹어갔다. 왜냐하면 그 말, 아니 그런 말‘들’을 들은 후부터 거울에 비친 내 몸뚱이가 못나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날씬과는 거리가 먼, 군살이 여기저기 붙은 ‘게으르고 아름답지 못한 몸’. 대체 왜 이렇게 살이 찐 거야 나는!
그리하여 열일곱의 나이에 난생 처음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운동할 시간이 없었기에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다. 밥도 반 반찬도 반 간식도 반. 한 번도 다이어트를 경험한 적 없는 몸은 부피를 쑥쑥 줄여나갔다. 신이 난 나는 반으로 줄인 식사량을 다시 반으로 줄였다. 그러니까 원래 먹던 양에서 1/4 만큼만.
순식간에 5키로가 삐졌다. 처음으로 ‘날씬하다’ ‘말랐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기 시작했고 바지사이즈가 두 치수나 줄었다. 크으, 다디단 날씬함의 맛이란! 힘에 겨웠던 여정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영양밸런스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칼로리에만 집착하는 어리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아름다운 몸은 곧 날씬한 몸이라고 굳게 굳게 믿으면서.
하지만 무작정 굶어서 뺀 다이어트는, 홀연히 나타나 짧은 시간 빛을 내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 같은 것인지라. 오로지 절제와 금욕에 의존하던 다이어트는 식욕이라는 욕망이 밀려오는 순간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다. 그렇다. 폭식증이 온 것이다. 음식에 대한 거대한 갈망과 욕구가 뱃속 단전부터 일기 시작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을 거야, 배가 터질 때까지 다 먹어버릴 거야 나는 이제 참지 않아, 못 참겠어!
그렇게 음식을 입에 마구 끌어다 넣었다. 폭식이 끝난 자리에는 죄책감과 좌절감, 자기혐오가 토사물처럼 한 데 섞여 남았고, 그것들은 나의 몸과 마음을 빠르게 잠식시켜갔다. 살이 찐 나는 더 이상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며, 추해 빠졌다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예쁜 옷을 입고 싶지도 않아. 밖에 나가기도 싫어. 그렇게 폭식증과 함께 우울증이 왔고. 때마침 방학이었던 지라, 나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좀비처럼 일어나 폭식을 하고 또 폭식이 끝나면······
다행히도 나의 폭식과 우울증은 새 학기가 가져오는 규칙적인 생활로 자연히 나아졌다. 하지만 날씬함에 대한 집착은 여전했다. 물론 전과는 다르게 짬을 내어 운동을 병행했고, 극단적으로 식사량을 절제하지는 않았다. 낮 시간 동안에는 먹고 싶은 것을 적당히 먹고, 저녁에는 채식위주로.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42~43키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살이 찔까 두렵고 걱정스럽다. 살이 오른 내 모습은 남들 눈에 다시 짧굵으로 비칠 테니까.
그래도 근 10년간 다이어트와 유지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얻은 것도 있다. 만성 소화불량과 위장장애. 고탄수화물 음식이나 고기, 튀김류를 먹으면 하루 종일 속이 더부룩해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다음날 점심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다(와우). 거기에 이따금씩 설사와 위경련까지.
만약 그때, 학생시절의 내가 그런 말들을 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팔다리가 소시지 같다느니, 짧굷이라느니. 그런 몸평 대신에, ‘살이 말랑해서 아기 같다’ ‘예란이는 아담하지’ 같은 말들을 들었다면, 아니, 애초에 몸과 관련된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폭식증과 우울증을 겪지 않고, 지금 건강한 신체를 가질 수 있었을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무례한 시선, 습관처럼 하는 얼평과 몸평, 장난처럼 건네는 외모에 대한 평가와 잣대가 뒤틀린 기준과 강박, 소외를 낳는 거니까.
하지만 나의 날씬함에 대한 강박은 단순히 주위 사람들의 얼평과 몸평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뒤에는 훨씬 커다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도록 부추기고 날씬한 몸을 얼씨구나, 하고 장려하는 ‘미디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매체는 성공하고 아름다운 주인공들을 날씬하게 묘사해왔다.
그 결과 날씬함은 자기통제와 성공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1979년, 섭식태도검사(Eating Attitudes Test)를 개발한 가핑클과 가너는 위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미디어는 날씬함에 대한 이상을 계발하며 마른 몸을 장려하고 있다. 일단 매체가 날씬하지 못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방식만 봐도 그렇다. 예를 들어 볼까.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 드라마 <드림하이>의 다이어트 전 아이유, 웹툰 <외모지상주의>의 주인공,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기타 등등들.
미디어 속 ‘뚱보’ 캐릭터들은 대게 자신감이 없고 열등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소위 말해 ‘찐따’처럼. 살을 빼기 전의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짝사랑하던 상대에게는 늘 외면당하는 공식을 따른다. 하지만 괜찮다. 살을 빼는 순간 그 모든 갈등과 부당함은 마법처럼 사라지니까, 유레카!
또한 미디어에 나타나는 신체이미지도 극히 제한적이다. 일단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주연 조연 엑스트라 구분 할 것 없이 날씬하다. 아니 날씬하다 못해 숟가락을 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랐다. 실제로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와 '외모,세모,네모'기획단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6년 상반기에 방송된 총 55편의 드라마 속 비만인은 25명, 전체 출연자 수와 비교하면 2.8 %에 불과하다.
이는 같은 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제 비만인구 수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수치다.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나아져 개성 있는 뚱보 캐릭터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활약하기도 한다. 가뭄에 콩대가리 나듯이 아주 가아끔.
이렇듯 미디어는 날씬함에 대한 환상과 뚱뚱함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계발해왔다. 날씬한 사람들에게만 소프트라이트를 비춰주고, 뚱뚱한 사람들의 존재를 프레임 안에서 아예 지워버림으로써. 그리고 그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나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이런 문장들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살이 찌면 나도 저런 취급을 받을 거야,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사랑 받기 위해선 날씬하고 예뻐야 해.
그래서 우리는 건강을 망치면서까지 무리하게 체중을 감량한다. 브라운관을 채우고 있는 44사이즈의 인물들을 보며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대해 비관한다. 여느 사람들은 매체에 반영된 신체를 ‘마땅히 추구해야할’ 목표로 설정해놓고,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질타와 비난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주위의 얼평과 몸평, 매체에 반영된 편향된 신체사이즈와 왜곡된 프레임.
날씬함에 대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내가 발견한 것들이다. ‘신데렐라’ 동화책을 읽던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는 이와 같은 것들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점점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기 힘들어졌다. 날씬하지 않은 몸은 아름답지 않으며 여자로서 매력적이지 않다고. 이제는 그것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아. 그런데 좀 억울하네. 한 사회의 악습과 병폐가 이렇게 한 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는데 그로인한 부작용은 오롯이 그 대상이 감당해야 한다니...!
후,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세상이 변하며 외모에 대한 무례한 발언과 사회의 삐뚤어진 프레임이 점점 정상궤도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 한걸음씩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외모에 대해 날카롭게 서 있는 촉을 조금씩 꺾어가며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 언젠간 미디어에서 제각기 다른 체형을 가진 인물들이 각각의 개성을 터뜨리며 서사를 엮어가는 모습을 볼 날이 오겠지.
그런 의미에서, 일단은 나부터 좀 다이어트니, 몸매 유지니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자고.
오늘 저녁은 풀떼기 말고 맛있는 걸로 먹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