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내가 20살이었을 적, 같이 하숙집에 살던 22살의 언니가 어느날 조용히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방에 들어서자,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언짢은 표정을 장착했다. 그리곤 결연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예란아, 너의 그 행동이 내 눈엔 참 안 예뻐 보였어.” 라고.
첫마디를 뱉은 언니는 곧이어 나의 특정 행동이 얼마나 자신의 눈에 거슬렸으며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 장렬히 읊어대기 시작했다. 거기까진 뭐, 괜찮았다. 2n년 간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쌓아온 사람들이 한 집에 우글벅적 살다보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겠거니. 마음은 아플지언정 뇌리에 시꺼먼 그을음으로 남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허나, 그녀의 발화는 곧 특정행위에 대한 비난에서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힐난으로 옮겨 갔다. 너는 이게 문제고 저런 부분이 마음에 안 들며, 그래서 내가 아주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그때부턴 속수무책 마음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손 써볼 새도 없이 아주 쩌적쩌적. 그렇게 갈라진 틈 사이로 신나게 칼날을 쑤셔 박던 그녀가 마지막 화심의 일격을 가했을땐 덜컥, 간신히 붙잡고 있던 내면의 무언가가 뱃속 단전까지 떨어지는 듯했다.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나는 저 말을, 저 말만은 버티지 못하겠구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겠구나,하고.
한 시간 가량 지속됐던 폭력의 시간을 견뎌낸 후 겨우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버렸다. 그리고 5일 밤낮을 꼬박 울었다. 20살의 나에게 그 말은 죽을 만큼 아프고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서러운 것이어서. 학교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수업을 듣는 중에도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도 줄줄줄줄 눈물이 났다.
그 사건으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언니가 그 날 시전했던 대화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 자리는, 서로 불편했던 것들을 얘기하고 행동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었다.
그발화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기분 나쁨을 나에게 퍼붓는' 것에 있었다.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 위해 내뱉는 말들. 머릿속 생각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던 언어. 자기만 억울하고 자신만 참아왔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마구잡이로 토해내던 감정덩어리.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방식으로 다 엎질러버린.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 있던 시간들. 그 일방적인 관계에서 ‘나’는 없었다.
그래서 눈을 홉뜨고 다짐했다.
나는 절대 저런 인간이 되지 않겠노라고.
조언 혹은 교육, 대화라는 명분을 도용해 상대를 깔아뭉개고 수치심을 주는 말을 입에 담는 인간이 되지 말자.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분별하지 않은 채 감정에 앞서 누군가에게 폭격을 가하지 말자. 경솔하게, 혀 놀리지 말자.
그 뒤로 나는 스스로 세운 결심을 지키기 위해 2가지 철칙을 마음속에 꾹꾹 새겨 눌렀다.
첫째, 입을 떼기 전에 신중할 것, 그리고 또 신중할 것.
사실 웬만한 일은 참는 편이지만, 한 공간에서 같이 살기 위해, 함께 일을 하기 위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럴 땐 입을 떼기 전에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였다. 일단 혼자 돌이켜 보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애썼고, 당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후엔 내가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제 3자와 이야기를 나누어봤다. 내 생각에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간과한 지점은 없었는지, 상대방의 입장은 어땠을지 등등.
정리된 생각을 텍스트의 형태로 전할 경우엔, 보내기 전 최소 3번 이상을 읽어보며 문체와 내용을 다듬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없는지 공격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그래도 혹시나 싶을 땐 상담해준 친구에게 최종 확인을 받기도 했다.
직접 얘기해야 할 때는 어떤 말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좋을지 다시 한 번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대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이 대화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잊지 말자. 이 대화의 목적이자 본질은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런 부분이 불편하니, 우리 서로 조금만 조심하자고. 그래서 더 나은 관계로, 더 나은 환경으로 나아가보자고.'
둘째, 상대방이 말할 기회를 충분히 줄 것.
나의 내면에 쌓여있던 것들을 덜어냈으면, 상대방게도 이 상황으로 인해 무거워진 마음을 덜어낼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고, 내가 오해한 부분이 있거나 미처 보지 못했던 점이 있다면 수용하고 인정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자기 할 말만 하고 상황을 종료시켜 버린다면 상대방은 그날 밤 창피하고 서러워서 밤새 뒤척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여기까지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사실 아직도 ‘혀’에 관한 문제는 통제가 퍽 어렵다. 여전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기 힘든 순간이 있고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언행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러면 또 감정에 휩쓸려 경솔하게 입을 뗐다가, 돌아서서는 '내가 왜 그랬지'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한다.
하지만 이런 자기반성과 타인에 대한 지난한 고민의 과정이 쌓여야 훗날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실은, 괜찮은 어른은 고사하고 ‘덜 부끄러운 어른’만 되어도 반은 성공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