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솔 Mar 11. 2021

그리 즐겁진 않아요.

8.

솔직히 말해서.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나의 직업과 직장을 밝히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첫 번째로 이야기하는 것이 '동물들을 실제로 많이 보냐'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듯이 늘 똑같은 패턴으로 '좋겠다'는 말을 남발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이제 대답을 줄줄 외운 것 같다. 귀여운 아이들과 하루 종일을 보내고 살아가는 게 즐겁지 않냐고 해맑은 표정으로 물을 때마다, 영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도대체 뭐가 즐거운지는 모르겠다, 내가 일하는 곳은 병원인데 말이다.


동물병원에서 일한다는 건,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반려동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보호자들의 울음소리가 공존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뿐만인가, 엄연히 살아있는 아이의 배를 갈라 장기를 들쑤시는 순간을 코앞에서 바로 봐야 할 때도 있으며, 숨도 쉬지 못하는 아이의 폐를 부서질 듯 주물러야 하는 순간도 여러 번 보게 된다. 오늘 촬영에는 항문낭 짜는 걸 찍다가 튄 항문낭을 직격으로 맞았다. 냄새가 아주 독해서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고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내가 제일 먼저 체크한 건 내 상태가 아니라 카메라 화면이었다. 혹여 렌즈에 묻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끼는 옷을 입고 갔는데 꼼작 없이 세탁기에 돌려야만 했었다.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이런 것들이 너무 낯설어서 내가 생각하기에 동물병원에서 일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차피 수의사가 아니니까 그런 것들하고 관련 없지 않아요?' 맞는 말이다. 어느 정도는. 나는 수술을 직접 집도하거나 치료를 전담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이긴 해도, 그게 '간접적'인 체험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때론 적나라한 수술 장면을 직접 촬영해야 하고, 사무실 문을 닫아도 뚫고 들어오는 비명소리를 감내하고 작업을 해야 하기도 하고, 제작 자료를 찾기 위해 불편한 장면들도 직접 내 손으로 찾아봐야 한다. 병원 내에서 나는 한 발자국 뒤에 있는 사람이지만, 눈까지는 감지 못하는 사람인 셈이다.




전문 분야에서 문외 했던 사람이 해당 분야에서 일하게 되면 가장 처음으로 맞는 난관은 '기초 배경지식'이다. 나는 동물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때문에, 동물병원에서 일하게 된 순간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 맞이하는 지식 투성이었다. 최근에 되어서야, 심장사상충 예방약을 한 달에 한 번씩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어릴 때 한 번 맞으면 평생 안 걸리는 거 아니야' 같은 헛생각을 하고 살았던 셈이다. 때문에, 나의 업무는 배움과 고난의 연속이다.


반려동물의 관한 지식과 상식은 여기저기 널려있다. 유튜브만 보더라도 수의사 선생님이 나와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알려주는 영상들이 떼거지로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정보를 캐치해나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영상마다 맞는 부분들도 있지만, 아예 완전히 다른 부분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들을 걸러서 수집하지 않으면 영상은 엉망이 된다. 심한 경우 가짜 뉴스를 퍼다 나르는 머저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몇 번씩이나 자료를 걸러서 확인한다. 아주 혼란스러울 경우, 외국 논문을 찾아 파파고에 돌려가면서 까지 말이다.


'저희 이러다 수의사 되겠어요' 같이 일하는 PD님에게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아주 농담인 말은 아니었다. 물론, 수의사가 되는 과정을 만만히 보고 '이 정도면 하겠다' 같은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다. A부터 Z까지 내가 모르던 것들을 공부하면서 나온 씁쓸한 말이었다. 나는 정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정보나 가져다가 쓸 수 없다. 또한 내가 어렵게 습득한 정보를 다시 쉽게 풀어나가야 한다. 영상을 보는 보호자들은 쉽게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집에 와서 유튜브를 틀었는데, 기존에 보던 추천 영상들이 죄다 반려동물 관련 영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뿐인가, 홀로 사는 나에게 맞춤 광고로 반려동물용품이 뜨는 게 아닌가. 아뿔싸, 병원에서 접속한 계정이 병원 계정이 아니라 개인 계정이었구나. 애써 외면하려고 스크롤을 내렸지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개인적인 마음이었다면 추천 영상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나는 어차피 관련 정보를 공부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없었다. 남들은 귀갓길에 강아지 고양이 영상을 보며 힐링한다는데, 나는 어쩐지 피곤하게만 느껴진다.

 



근원적으로 고통이 있는 공간에서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다. 앞서 말한, 지식에 관련된 업무적인 것을 넘어 좀 더 다차원적인 스트레스에 가깝다. 이미 업무만으로 충분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을 드러내고 우는 소리를 낸다면 근무환경이 결코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일하는 곳은 그렇다. 생명을 다루기에 좀 더 진중하지만, 그만큼 고통에 직접적인 곳.


남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뱉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누군가에게 낭만인 삶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내가 그 일이 괜찮을지 고려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감정에 무딘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나, 직장인으로서 미지의 영역을 공부할 준비가 되었냐는 물음은 누구나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영상을 만드는 일이야 내가 적어도 몇 년간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자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어떤 것을 담아야 하는지는 내가 미처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당신이 프로듀서로서 어떤 일을 하기를 각오했다면 그 분야에 대해서 공부하겠다는 각오와 노력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지식에 관해 왈가왈부할 정도로 깊은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누군가에게 노력을 강요하고 싶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글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하나, 나는 수의사가 되고 싶은 각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거대한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어떤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나처럼 힘들다고 느낄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로듀서로서 뿐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일하는 공간을 선택하게 될 때에 중요한 요인은 수도 없이 많다. 연봉이나 복지, 근무환경도 중요하지만 진짜 근무하게 될 공간과 해당 일에 대한 열정과 배울 의지 또한 깊이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동물이 그저 좋다는 이유만으로 동물병원에서 일하겠다는 프로듀서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말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원문에 게시되는 글은 모두 의학적 소견이 아닌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자세한 증상이나 문의는 가까운 동물병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병원은 분명 슬픈 공간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