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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y 21. 2021

지글지글 찹쌀 빈대떡

오뚜기 푸드 에세이

        스뎅 그릇에 찹쌀가루와 물을 넣고 섞는다. 숟가락으로 퍼 올렸을 때 덩이 져 뚝뚝 끊기듯 흐르는 되직한 정도가 좋다. 식용유를 훌훌 두른 프라이팬이 적당히 달궈지면 숟가락으로 반죽을 두어 번 퍼 올린다. 반죽이 두꺼워 설익지 않도록 고르게 펴준다. 지글지글, 가장자리가 노릇한 빛을 띄면 뒤집는다. 다시 한번 지글지글. 접시에 옮겨 담고 그 위에 황설탕을 솔솔 뿌린다. 갓 구워낸 찹쌀 빈대떡은 아주 찐득하다. 젓가락이며 치아에 들러붙는 찹쌀 빈대떡을 입안에 가득 넣는다. 기름에 바싹 튀겨진 고소한 맛에 아득하고, 설탕의 단 맛에 황홀하고, 찹쌀의 쫄깃한 식감에 우물우물. 배가 허할 때 간식으로 딱 좋고, 가끔은 가벼운 식사로도 훌륭하다.


        작은 공장에서 아빠와 엄마는 지워지지 않는 까만 기름때를 손톱 아래까지 듬뿍 묻히며 하루 종일 기계나 철사 따위를 만졌다. 열 살 즈음인 그 시절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 배고파. 일하는 엄마 곁에서 칭얼거리면 엄마는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우리 딸, 뱃속에 뭐 키우나. 맨날 천날 배고프다 카노. 그러면 나는 덜컥 무섭기도 했다. 양호 시간에 배운 것처럼 사람의 뱃속에 사는 회충이 내가 먹는 족족 빼앗아가는 바람에 이렇게 배가 고픈가 싶기도 해서. 그러나 엄마가 작업복 앞치마를 벗고 공장에 딸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금세 히죽 웃음이 나왔다. 냉장고에서 비닐봉지를 꺼내고 그 안의 찹쌀가루를 스뎅 그릇에 붓는다. 얼마 안 되어 기름 냄새가 가득하다. 황설탕을 솔솔솔, 이가 찐득하도록 달고 고소한 그 맛.

“엄마도 얼라 때 찹쌀 빈대떡 억수로 좋아했는데. 딸내미 아니랄까 봐 입맛도 엄마 쏙 뺐네.”

나는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가 좋았다. 엄마를 닮았다는 말은 더 좋았다. 부러 맞춘 것이 아닌데도 자연스레 엄마를 닮았다는 나. 그건 가장 확실한 사랑이었다.


        취업을 하고 서울 살이를 시작했다. 연고 없는 타지에서 스스로 벌어먹고사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달을 보고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하는 날의 연속이라 주말에는 어두운 원룸에 틀어박혀 침대에 축 늘어져있기 일쑤였다. 엄마는 가끔 전화를 했지만 묻는 말은 항상 같았다.

“딸, 밥은?”

어, 대충 먹었어. 실은 내내 빈속이었지만 먹고 치우는 것이 수고스러워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엄마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얼마 뒤, 고향에서 올려 보낸 택배엔 단단히 포장한 김치와 밑반찬들, 그리고 찹쌀가루가 들어있었다. 고된 공장 일을 마친 뒤늦은 밤까지 비닐 포장을 꽁꽁 동여매며 정성껏 준비했을 엄마의 반찬은 그대로 냉장고로 들어간 뒤 잊혔다. 또다시 출퇴근의 반복이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들고, 내가 가장 지친 것만 같던 시기였다. 며칠, 아니 몇 주가 지나서야 냉장고 문을 열었다. 푹 삭다 못해 상해버린 김치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래서 반찬 보내지 말랬는데, 싶은 마음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상한 음식을 정리했다. 반찬통에 치여 구석으로 밀려난 찹쌀가루 봉투가 드러났다. 퍼렇게 핀 곰팡이로 얼룩덜룩했다. 이건 음식물 쓰레기일까 일반 쓰레기일까 고민하다가 냉장고 앞에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썩어가고 있던 찹쌀가루처럼 어느새 나도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잘못은 나에게 있는데 괜히 엄마, 엄마 부르며 아이처럼 울었다.


        어느덧 서울 살이 6년 차에 접어들었다. 정시에 퇴근하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먹는다. 한 번은 찹쌀 빈대떡이 그리워 마트에서 찹쌀가루를 샀다. 밀가루처럼 곱게 빻은 그 가루는 쉽게 되직해지지 않았고 바삭하게 구워지지도 않았다. 한없이 묽은 그 반죽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올려 보내준 찹쌀가루는 할머니의 것이다. 직접 키운 찹쌀을 물에 불린 뒤 방앗간에 맡겨 직접 빻아낸 거칠고 투박한 가루. 할머니의 찹쌀 빈대떡을 먹고 자란 엄마는 찹쌀 빈대떡으로 나를 먹여 키웠다.

“엄마, 집에 찹쌀가루 좀 있나?”

“와. 빈대떡 먹고 싶나?”

“응. 마트에서 파는 걸로는 빈대떡 안 되던데.”

전화기 너머 엄마의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다. 가시나야, 그걸로 안 되지. 할머니가 얼마 전에 준 거 있다. 보내줄게.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 집 냉동고에는 찹쌀가루가 가득하다. 이제 찹쌀가루는 금방 쉬기 때문에 오래 먹으려면 냉장 보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됐다. 나의 마음과 몸을 자주 들여다보며 든든히 먹이고 살뜰히 보살펴야 쉬이 무너지지 않는 것 또한 아는 나이다.


        스뎅 그릇에 찹쌀가루를 붓는다. 너무 묽어지지 않도록 신중히 물을 붓는다. 달군 프라이팬에 반죽을 올리고 골고루 편다. 지글지글. 가장자리가 바삭하게 익기를 기다리며 고소한 냄새를 듬뿍 맡는다. 할머니가 엄마를 키웠던, 엄마가 나를 키웠던 사랑 어린 기름 냄새다. 잘 살아야 한다.


#오뚜기 푸드에세이에서 사랑상을 받은 글입니다. 심사 완료되어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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