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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Aug 27. 2021

설레는 건 누구랑도 할 수 있지만


        연인과의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 친이랑 방귀 텄어?”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웹툰을 읽었다. 어렸던 20 초반 즈음 연애를  ,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 자주 거론되는 주제였다. ‘애인과 어디까지   있나?’ 여기서 목적어는 주로 방귀, 트림 같은 생리적 현상이다. 그게  귀하다고 숨기냐는 털털한 친구가 있는 반면  죽어도 그것만은 사수한다는 비장한 친구도 있었다. 나로 말할  같으면,  텄다. 공식적으로는.




        혼자 산 지 10년이 됐다. 그 기간은 누군가와 함께 할 때보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바꾼다. 혼잣말이 늘고, 생리 현상을 태연하게 내뿜고, 샤워할 때 갖춰 입을 옷을 챙기지 않는다. 10년에 걸쳐 서서히 단단하게 자리 잡은 습관인 데다 생활에 피해 가는 점이 없다 보니 구태여 고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안정적이고 자유로웠다.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연인의 등장은 어찌 보면 불청객이기도 했다.


        그는 종종 나의 집에서 자고 간다. 몇 시간을 잠깐 머무르다 떠나는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하루에서 길게는 이틀, 삼일을 함께 보내는 건 다른 문제다. 먹고 놀고 마시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나는 대체로 그 모든 걸 혼자 하는 걸 선호하지만, 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고 싶은 존재니까. 그러나 잔다는 것은 잠에 빠진 정말 무방비한 상태의 모습을 보인다는 의미다. 자다가 나도 모르게 으으 소리를 내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눈곱이 잔뜩 끼고 퉁퉁 부운 아침의 모습들. 혼자 잠들고 일어나는 게 익숙한 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약해 보이고 그럴까 봐. 그래도 어떡하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싫은 마음을 이긴다.


        그렇게 사건은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다. 드라마에선 갑자기 사건이 터지는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작가의 섬세한 계산에 따른 일이다. 현실에선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허리를 숙이다가 뿡, 조급한 맘에 조금 속도를 내서 뛰어가다 뿡, 뭐... 그렇게 된다. 그럴 때 나의 연인은 바람직하게 보고도 못 본 척을 한다. 정확하게는 듣고도 못 들은 척, 맡고도 못 맡은 척이지만. 몇 번 그러다 보니 나도 태연해졌다. 부러 그런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귀까지 빨개지지는 않게 되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흩트리면 그도 동일하게 모른 체한다.


        실은 나보다 연인이 훨씬 그런 부분에 민감하다. 생리 현상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처리하고 싶어 한다. 가스 배출을 위해 화장실을 다녀온 적도 있다. 나도 그를 위해 어련히 모른 척을 한다. 아마 그도 내가 아는 걸 알겠지.




        우리는 서로의 일부분을 알면서 모른 체하지만 그게 둘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어느 노래 가사는 분명 사랑을 하는 이가 썼을 거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있다. 나는 잠결에 땀을 많이 흘린다는 걸 아침에 눈을 떠서야 한다. 젖은 잠옷과 찝찝한 몸으로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자는 날에는 아침에도 보송하고 청결하다. 새벽녘 땀이 밴 축축한 등을 보고 거실에 놓였던 선풍기를 끌고 와 곁에 둔 연인의 손길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넨다. 나는 샤워를 하고 나면 언제나 갈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도 그렇다. 나의 집에는 암막 커튼이 없지만, 작은 빛에도 잠을 설치는 연인을 위해 안대가 항상 머리맡에 놓여있다. 얼음 없으면 음료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의 취향을 위해 냉동실엔 항시 얼음을 구비 중이다.


        여느 연인들처럼 주말이면 곱게 단장하고 나서기도 하지만 대체로 오전 내내 늘어져있다. 꼬순내를 풍기는 기름진 얼굴을 하고 뭐 먹을까, 배달시킬까, 따위의 대화를 나눈다. 일어나야지~ 하는 의미 없는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고. 6년 차를 앞둔 관계에 간질간질한 설렘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포근한 담요 위에서 골골거리며 낮잠 자는 고양이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닮은 안정과 다정이 있다. 내가 어느 무엇이 되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충분한 관계. 연인이 다른 모습이 되지 않고 그저 이대로만 있어주면 모든 게 충족되는 관계.


        젊을 때 더 많이 만나봐야 진국을 알아본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설렘이 달콤하다는 것도 알아서, 몇 년 전엔 더 이상 내겐 새로운 만남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적도 있다. 지금에 와선 달라졌다. 설레는 건 누구랑도 할 수 있다. 사람이든 공간이든 상황이든, 설레는 요소를 갖추면 언제고 설렐 수 있다. 그렇지만 연인이 주는 단단한 안정과 충만함은 그만이 줄 수 있다. 그와 나여야만 가능한 관계다. 문득, 선연히 보이는 확실하고 소중한 애정에 감사하다.


#Cover Photo by Nick Fewing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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