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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Jun 09. 2018

싱거운 이유로 결혼을 하고 싶었다

새벽 2시 화재경보기가 울렸을 때, 그 순간만큼은 결혼이 절실했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쩍 지인의 결혼 소식이 잦다. 

이번 달만 해도 벌써 3번의 결혼식을 다녀왔고, 앞으로도 1번의 결혼식이 남았다. 참석하지 않고 축의만 전달한 결혼식까지 포함하면 족히 6번은 되리라. 최근에는 30대 중 후반에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많다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또래의 결혼 소식이 유독 잦다. 내 주변에는 평생을 함께할 좋은 사람을 빨리 찾은 행운아가 가득한 모양이다. 


결혼 전, 청첩장을 주고받으며 축하의 말을 나누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다.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어?” 


다양한 대답이 있었지만, 결혼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 꿈꾸던 것만큼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친구 L은 6년을 연애하다 보니 ‘시나브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남자 친구는 단점이 있지만, 그녀가 충분히 감수할 만한 수준이며, 여전히 남자 친구가 좋다고 했다. 친구 K는 10여 년의 긴 연애가 끝난 뒤, 바로 다음 연애에서 1년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래 연애를 하고 나면 ‘꼭 이랬으면 좋겠어’가 아니라 ‘이것만 아니면 돼’라는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에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이번에 결혼하는 상대는 통하는 부분이 많을뿐더러, ‘절대 안 되는 리스트’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소설이나 영화처럼 로맨틱하지 않은 이런 대답을 들으면, 불과 몇 달 전의 나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인데!’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에게 결혼은 나와는 아메리카노와 김치처럼 아주 이상한 조합이었고, 결혼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못 해도 10가지 정도는 앉은자리에서 말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경제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고, 대학원 졸업이나 집필과 같은 인생의 목표를 몇 가지는 완료해서 심리적으로 안정된 이후일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런 일상적인 대답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에겐 정말 싱거운 이유로 결혼을 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날은 오랜만에 팀 회식이 있어 늦게 귀가한 참이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샤워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꿀 같은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러운 소음이 귀를 때렸다. 화재경보기였다. 학창 시절, 재난 대피훈련 때나 듣던 경고음이 울리며 소름 끼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소리쳤다. 


‘비상 상황입니다. 대피하십시오. 비상 상황입니다. 대피하십시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잠은 저 멀리 달아난 후였다. 안절부절못하며 밖으로 대피해야 하나 고민할 때,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이야기가 있었다.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리는 범죄에 관한 것이었다. 




20살 때부터 자취를 시작한 나는 유독 여자 혼자 사는 원룸에 대한 괴담을 많이 접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주변에서 걱정 반 장난 반으로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하나는, 건물 외부에 설치된 원룸 전기 차단기를 조작해 일부러 전기를 끊는다는 괴담이었다. 갑자기 전기가 끊겨 차단기를 확인하기 위해 원룸에서 나오는 사람이 여자인지 아닌지 확인 후, 나중에 그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간다는 스토리다. 아주 그럴듯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섰지만, ‘에이, 요즘 전기 차단기는 다 집 안에 있어!’라며 애써 무시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 이야기가 떠오르다니. 


당장 대피하라는 경고음이 온 건물을 울리는데, 나는 그런 괴담 따위가 두려워서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햄릿은 생사를 고민하기라고 했지, 나는 불에 타 죽느냐, 범죄자의 칼을 맞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경보기가 오작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기가 나는지 확인하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중, 도움을 구할 사람은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 멀리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사는 가족이 아니라, 그래도 여차하면 달려와 줄 수 있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2시, 전화벨 소리에 깬 것이 분명한 잠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잔뜩 긴장해서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드디어 피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오빠, 자는데 갑자기 경보기가 울렸어. 연기는 안 나는 것 같아. 그런데 무서워서 못 나가겠어.'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던 중 경보음이 그쳤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다음 날, 건물 엘리베이터에는 화재경보기 오작동에 대한 사과문이 붙었다. 




그날 밤, 화재경보기가 울렸던 5분은 결혼을 단숨에 내 삶에 들여놓았다.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면 경보기가 울린 그 시점에 손을 맞잡고 바로 밖으로 달려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존재하지도 않는 문밖의 가해자를 두려워하며 불에 타 죽으면 어쩌지 수십 번 고민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결혼과 화재경보기에 관해 이야기하면 대부분 어이없어하며 말한다. ‘고작 그런 일로 결혼을 하려 하다니,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혹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가볍게 웃어넘긴다. 


화재 경보음에 손잡고 같이 대피할 사람을 찾는 일은 결혼이 아니라도 많겠지만,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내가 결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결혼과 담쌓았다고 2n 년 간 망설임 없이 말하고 다녔던 나는, 그 날 새벽 화재 경보음과 함께했던 5분으로 어쩌면 결혼을 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정말 알 수 없고도 싱거운 일 투성이다. 마치 나와 결혼, 그리고 화재경보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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