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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y 09. 2018

언니는 오만원으로 사람을 울렸다

그것도, 그녀의 결혼식장에서.


지예 언니가 결혼했다.

언니의 고향인 부산에서, 홍콩에서 나고 자란 남자와 평생을 약속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23살이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어른이지만, 사실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나에게 26살의 언니는 '진짜 어른' 같았다. 




언니의 첫인상은 한 마디로 '튀었다'.

검은색 긴 생머리, 눈꼬리를 길게 뺀 아이라인, 몸에 딱 붙는 검정 가죽재킷, 아슬한 길이의 짧은 치마에 망사 스타킹, 그리고 아찔한 높이의 구두. 이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와 붉은 립스틱, 그리고 그녀가 운전하던 빨간 스포츠카. 십 대 시절에 푹 빠져 읽던 인터넷 소설에 등장하는 '센 언니'의 클래식한 묘사 같지만, 언니의 첫인상은 딱 그랬다. 언니는 센 언니였다. 



언니는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농도 짙은 기름. 

외모가 아니라, 풍기는 아우라가 그랬다. 그 아우라는 주변에 녹아드는 대신 물 위를 덮어버리는 기름 같은 성질을 지녔었다. 넓게 퍼진 기름은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색다른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와 있으면, 그 시절에 특히 맹탕 물 같던 나도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된 기분이었다. 강렬한 색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주위의 어둠을 더 짙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필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니는 달랐다. 그녀의 색은 빛나면서도 다른 색을 해치지 않았다. 


언니와는 그날 있었던 우스운 이야기, 무거운 고민거리, 혹은 허황될 정도로 먼 미래의 꿈도 나눌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겁거나 혹은 편안한 마음으로. 



언니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주로 귀를 기울이는 편이었다. 옳다, 틀렸다 판단하는 일 없이, 잔잔히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토닥여줬다. 동시에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요 없이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강한 주장은 타인의 손가락질로 이어질까 두려워 어떻게든 동그랗게 표현하려는 나와는 상반된 사람이었다. 쉽게 가까워지기 힘든 첫인상에 그녀를 모난 눈으로 보던 이들도, 어느새 언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과 현재가 다른 이들은 어느 정도 가려서 만날 법도 한데, 언니는 그러지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 말을, 언니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언니는 모두가 장단이 있고, 장점을 더 높게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 언니의 주변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나와 맞지 않는 점부터 빠르게 파악해서 일찌감치 관계를 마무리짓고, 당연하게도 마음을 나누는 친구는 손가락에 꼽는 나와는 정말 달랐다.




그래서 언니가 좋았나 보다. 나와 달라서, 그렇지만 닮고 싶은 사람이라서 좋았다. 

자기 색이 분명하지만 다른 색을 해치지 않고, 일반적인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감히 이해할 수도 없는 마음의 깊이를 가진 언니를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함께 지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 평생 보면서 지내자고 손가락을 걸만큼 가깝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추억 가득한 그 시절의 언니를 떠올리면 항상 그리웠다. 



그런 언니가 어느 날, 몇 년 만에 연락이 와서 결혼한다고 했다. 

"언니는 결혼 안 할 줄 알았어", 이 말이 먼저 나왔다. 언니는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아름다움이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작은 식장에는 언니와 묘하게 닮은 그녀의 가족, 그리고 홍콩에서 온 신랑의 가족, 그리고 그 시절을 함께했던 나와 언니의 친구 몇 명. 다른 결혼식에서 흔히 보는 휘황찬란한 장식은 없지만, 뷔페만큼은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곳으로 식을 꾸린 것마저도 언니 다웠다. 



한창 식을 보던 중이었다. 

축의를 받던 언니의 사촌이 다가와서, 언니가 전하라고 했다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안에는 오만원이 담겨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결혼식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거리가 꽤나 있기 때문이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나를 위해 언니는 차비 오만원이 담긴 봉투를 마련해두었다. 




연락이 끊겼던 몇 년간 언니가 아주, 아주 힘든 일을 겪었다고 한다.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 없는 아픔에 도망치듯 떠난 홍콩에서 인연을 만났다고 한다. 언니는 그간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연락을 안 한건 마찬가지였는데, 언니는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만원을 마련해두었다. 혹시나 올 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누군가는 원래 멀리 오는 손님에게는 준비하는 거라고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나는 아직 그 돈을 쓰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쓰지 못할 것이다.

 

지예 언니가 그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란다. 아름답던 그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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