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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Jun 26. 2018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그곳이 그리워졌다

영화 ‘레이디버드’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맞이해, LA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레이디 버드'를 봤다. 

낮 비행기라 잠은 오지 않고, 마땅히 볼 만한 영화는 보이지 않아서 생각 없이 봤던 영화였다.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를 연기한(어톤먼트를 보지 않았다면, 네이버에 검색해보시길. 브라이오니의 악명은 기대 이상이다.) 시얼샤 로넌이 보이기에 '연기 잘했지'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웬걸, 두어 시간 뒤에 나는 거의 꺽꺽 거리며 울고 있었다.


극 중 크리스틴(시얼샤 노넌)은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이름 붙였다. 자기 이전의 존재, 그러니까 그녀의 엄마가 붙여준 이름을 거부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부끄러워하며 동네의 어느 부잣집을 자기가 사는 곳이라고 거짓말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의 고향 새크라멘토를 언제나 떠나고 싶어 하며 '난 뉴욕에 갈 거야!'를 입에 달고 산다.




10대 후반의 나는 ‘레이디 버드’였다. 

가족, 고향, 학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답답했다. 일상이 단조롭고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TV나 인터넷, 책을 통해 접하는 세상은 그렇게나 넓고, 다채로운 삶이 가득한데 나는 왜 여기에 갇혀있지?라고 생각하며 매일 밤 다짐했다. 언젠가 꼭 떠나겠노라고. 20살이 되면 떠나고야 말겠노라고.


20살은 상징적인 나이였다. 쳇바퀴 도는 듯한 수험 생활을 마무리하고 난 뒤, 해일처럼 밀려오는 해방과 묘한 허무 속에서 아무런 계획도, 뚜렷한 미래도, 이렇다 할 책임감도 없지만 어찌 되었든 '어른'이 되는 순간. 모의고사보다 평균 2등급은 떨어진 수능 성적표로는 지망하던 대학을 갈 수 없었지만, '고향을 떠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20살이 되자마자, 나는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겠다는 내 의견에 엄마는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가 살 곳을 알아보고, 나를 보낼 준비를 했다. 엄마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편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족과 함께 있으면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이유모를 조급함이 있었다. 고향을 떠나야만 내 삶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아빠와 함께 학교 앞에 마련한 작은 자취방에 짐을 옮기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근처 마트에 들렀다. 전자제품 코너에서 엄마는 아주 큰 8인용 짜리 전기밥솥을 골랐다. 혼자 사는데 이렇게 큰 밥솥은 필요 없다며 불평하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밥솥이 커야 밥을 많이 해놓지. 한 번에 밥해서 얼려두고 먹어라. 이제 평생 떨어져 살 건데, 밥 챙겨 먹는 연습부터 해야지." 그 순간, 고향을 떠난 게 실감 났다. 나는 고향을 떠남과 동시에 가족의 품 또한 떠났다는 사실이 성큼 와 닿았다.


그날 밤은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전기밥솥을 사놓고, 다음 날 출근하기 위해 서둘러 떠나는 엄마 아빠의 차를 배웅하고, 집으로 올라와 청소를 하고, 잠들기 전 이불에 누워서 바라본 천장이 너무 낯설었다. 낯선 도시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에 조금 무서웠다. 수능 이후로 모든 게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빠르게 흘러갔지만, 자취방에 누워서 바라본 그 천장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겁이 많은 내가 혼자 잘 자는지 걱정되어 전화한 엄마에게, 부러 밝게 목소리를 냈었다.




레이디버드는 결국 뉴욕으로 간다. 

그녀의 엄마 몰래 뉴욕의 어느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레이디버드가 항상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엄마와 깊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뉴욕으로 떠났다. 어느 파티에서 레이디버드는 스스로를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그녀는 고향 새크라멘토에서 처음으로 운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가족이 있는 고향과, 그곳을 운전하는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크리스틴과 엄마가 공유하는 기억을 전화 너머로 엄마에게 전하며 영화는 끝난다. 'I love you'라는 말과 함께.


'I love you' 와 함께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나는 그 시절에 레이디버드였고, 또한 지금은 크리스틴이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서 떠났다. 그리고 고향을 떠난 그 순간부터 그곳이 그리워졌다. 더 정확하게는, 고향에 있는 가족이 그립다. 밥을 해 먹는 것도 아니면서 8년째 간직하는 전기밥솥과 8년 전 그 천장을 떠올리면 특히 그렇다. 이번 주에는 꼭 고향에 내려가서, 그리운 얼굴을 눈에 많이 많이 담아와야겠다. 조금 더 용기를 낸다면, 영화의 마지막 말도 소리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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