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송이 Oct 21. 2020

엄마는 다 똑같나 봐


이사가 정해지자 다양한 사람들이 집을 보러 왔다. 함께 살 집을 구하는 신혼부부, 회사 근처 집을 구하는 싱글 직장인, 시아버지를 모실 곳을 찾는 노년의 부부, 그리고 대학생 딸의 자취방을 구하는 엄마. 결국 집은 노년의 부부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 집은 14층의 오피스텔에 인근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었는데, 특히 요양병원을 포함한 중대형 규모의 병원들이 도보 혹은 차량으로 10분 내외의 거리에 있다는 것이 큰 이점이지 않았나 싶다. (시아버지가 요양병원을 다니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지만 지금은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오피스텔 근처에 위치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 딸의 통학 편의성을 높여주기 위해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니신다던 그 어머니는 아주 세련된 스타일이었다. 와이드 블랙 팬츠에 캔버스 운동화, 반질반질 올백으로 넘겨 포니테일로 묶은 헤어, 깔끔하고 똑 떨어지는 아이라인에 글리터가 듬뿍 들어간 립글로스 까지. 내가 이렇게 자세히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마스크를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방문자들은 신혼이라던가 노년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연령대는 모호하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눈만 볼 수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와 목소리로 추측했을 뿐이다.


다행히(?) 밖에선 마스크 착용을 준수하는 듯 그녀의 바지 주머니에 슬그머니 비어져 나온 덴탈 마스크의 하얀 끈이 보였다. 어쨌거나, 거침없는 첫인상에 발가락에 힘을 주며 긴장하고 있는데, (그 당시 코로나 2.5단계 격상된 터라 장기간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예정 없던 방문자는 추리닝을 입고 맨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마주해야 했다.) 방 한 칸짜리 오피스텔에 딸린 0.5평이 될까 말까 한 다용도실을 유심히 보던 그녀가 별안간 나를 보며 물었다.


“빨래는 어디다 널어요?”


순간, 나도 모르게 ‘네?’ 하는 소리가 어벙한 표정과 콤비로 나올 뻔했지만, 소리는 두 달 여에 걸친 재택근무가 준 목 잠김이, 표정은 마스크가 가려줬다. 그녀는 아주 진지한 표정이었다. 사실, 3년을 살던 사람으로서 빨래 외에 그 집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하게 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방문자 뒤엔 중개사가 서 있어 없는 듯 벽에 붙어 서 있기만 했었다. 혹시나 누군가가 ‘여기 살면서 불편했던 점은?’이라고 묻는다면 벽을 타고 올라와 (13층임에도 불구하고) 방충망을 절대 열지 못하게 하는 바퀴벌레의 존재, 창문 실리콘을 얼룩덜룩 곰팡이 무늬로 수놓는 여름철 습기, 이제 곧 10살밖에 안 되는 데도 고장이 잦아지는 빌트인 전자기기, 환기하려 창문만 열었다 치면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담배 냄새 중 어떤 걸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까 내심 고민해보기도 했었다. 단지, ‘빨래는 어디다 너는가’는 준비된 답변이 없어서 순간 당황했을 뿐이다.


Photo by Emily Chung on Unsplash


동시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자취 시작한 지 10년, 총 7번의 이사를 하며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할 때마다 묻던 말, “빨래는 어디다 너노?”가 떠올랐다. 뜬금없이 향수 같은 게 몰려와, 진지하게 내 답을 기다리는 방문자의 맨얼굴을 봐도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팔로 공간을 만들며) 책상 밀어놓고 여기다 널어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는 떠났다.




엄마와 통화하며 물었다. “엄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엄마들 다 똑같나 봐. 빨래 너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엄마는 아주 큰일 날 소릴 한다는 듯 답했다. “빨래 널 데 없으면 꿉꿉해서 못 산다.” 여름마다 올라오는 습기가 끈끈하게 달라붙어 잠을 설치던 밤을 생각하면, 습기가 무섭긴 하다.


방문자는 다음 날 저녁 다시 왔다. 이번엔 그녀의 대학생 딸과 함께였는데, 아마도 엄마 입장에선 집이 꽤나 마음에 들어 실제로 살아야 하는 딸에게 보여주려 한 것 같았다. 딸은 조심스럽고 짧게 집을 둘러보고 나서려 했는데, 엄마는 나의 존재를 전혀 개의치 않고 냉장고와 옷장을 활짝 열며 딸에게 자세히 보라고 했다. 딸은 “엄마, 그거 실례야!” 하며 황급히 말렸지만, 사실 크게 불쾌하지 않았다. 딸의 빨래를 걱정하는 엄마에게서 우리 엄마가 겹쳐진 후로 마음이 넉넉해졌었던 듯하다.




빨래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청결을 위한 집안일, 그러나 집 밖을 나서서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나서는 순간 본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생활의 무게. 하루치는 적지만 어느새 산더미처럼 쌓여 난감하게 만드는 일상의 흔적. 물론, 가족과 살아도 본인의 빨래는 스스로 감당한 올바른 이들이 많겠지만, 자식에게 생활 노동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총대를 맨 엄마 또는 아빠, 혹은 다른 이가 있다면 빨래의 무게를 이해하고 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빨래를 도맡아 한다는 건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흰 빨래와 검은 빨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이상하게 손은 따라주지 않아 원래는 빛을 뿜어내듯 흰 셔츠가 얼룩덜룩 흰색도 아이보리도 회색도 아니게 염색되기도 한다. 흰색과 검은색을 구분한다, 그러면 빨간색이나 파란색은? 노란색과 초록색은? 온갖 무지개 색의 옷은 죄다 단독세탁을 해야 하나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울샴푸가 좋다는데 그럼 죄다 울샴푸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다가 세탁이 되다 만 얼룩 진 옷을 입고 나갈 수도 있다. 토요일 저녁에 돌린 세탁물을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널어 마르고 나서도 쿰쿰한 냄새가 날 수도 있고, 몇 번 그러다가 결국 한 세탁물을 두세 번 헹굼/세탁 코스를 돌려 섬유유연제 닳는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의 “빨래는 어디다 나느냐”는 질문은 자식이 빨래를 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빨래로 인해 망가질지도 모르는 자식의 생활을 마음 쓰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되지 못한 빨래는 일상에 영향을 준다. 하루 종일 쿰쿰한 냄새를 지니고 다녀 나도 불쾌하고 만나는 사람들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빨래가 제대로 되려면 확실히 건조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한데, 공간과 통풍이다. 충분한 공간이 없다면 통풍이 잘 되어도 좁은 건조대에 겹쳐서 널린 빨래는 어쩔 수 없이 쉰내가 나게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한, 빨래가 말라 가는 동안 방안에 들어차는 습기는 계절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의 습도를 만들고, 이는 쾌적한 생활에 방해가 된다. 빨래를 어디다 너느냐는 물음은 이 집에서 자식이 충분히 휴식하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느냐는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그런 마음이 빨래로 표현되는 것도 울컥하다. 빨래는 응당 개인의 생활의 흔적이니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집에서는 가족 중 누군가가 담당했을 테고, 아마 그 담당자는 빨래를 어디다 너느냐가 궁금한 사람이겠지. 나는 엄마가 내게 그 물음을 했을 때, 첫 자취를 시작할 때는 “그냥 방에 건조대 놓고 널면 되지!” 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내가 먼저 나서서 빨래 공간을 보기 시작했다. 살아보니 엄마 말은 틀린 게 없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빨래가 잘 되는 곳이 반드시 좋은 집은 아닐 수 있지만, 빨래가 잘 안 되는 곳은 좋은 집일 수 없다. 이걸 나는 10년 정도 걸려 체득했지만, 엄마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식이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 맡아주었던 빨래를 넘기기 전에, 최대한 덜 고생스러운 곳을 터로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이겠지.


Photo by Harry cao on Unsplash


최근에 이사를 하고, 매일 아침, 그리고 자기 전에 하는 일이 빨래 널기와 빨래 돌리기다. 이사 준비 동안 소홀했더니 그 새 산더미처럼 쌓여 차근차근 처리하는 중이다. 그리고 매번 빨래를 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그리고, 가끔 전화를 건다. “방금 빨래 널었어. 햇살 아래 말리려고.”, “잘했네, 거기 베란다에 널어 햇볕 잘 받게.” 베란다에 널어 햇볕을 많이 받으란 말을 매번 하면서도 언제나 중요한 듯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응, 그럴게, 답하면서도 설핏 웃음이 난다.



# Title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