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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Aug 30. 2020

빛나던 시절을 그리며 살아가겠지

추억이 현재를 살아가게 하니까



오랜만에 옛 일기장을 펼쳐보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5년 전의 내가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적은 글이자, 그 당시 나보다 5년을 앞서있던 선배를 보며 적은 글이다. 시작은 이렇다.




“나 대학 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술이 얼큰히 올라 벌건 얼굴로 선배가 말했다.

입사 후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같은 팀에 있는 동료들과 MT를 갔었다. 주말을 할애해 1박 2일 일정이었던 그 여행은 업무와는 상관없이 순전히 재미와 친목을 위한 것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회사 내에서 악명 높은 공공의 적인 팀장님이 있었고, 그래서 똘똘 뭉치기 수월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서울에 가깝게 지낼 친구 하나 없이 외로웠던 그땐 그런 게 즐거웠다.


강원도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이곳저곳 알차게 쏘다니고 숙소로 돌아와 여지없이 바비큐를 해 먹었다. 숙소 앞 설치된 타포린 천막 안에서 두터운 패딩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고기를 곁들여 술을 마셨다. 밤 열 한 시 즈음 오늘 고향에 일이 있어 참석이 어렵다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근처 다 왔어, 뭐 필요한 거 없냐?”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질 무렵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 반가웠다. 식어가던 불꽃이 살아나듯 다시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고, 늦게 온 선배도 속도를 맞춰 금세 취했다. 술 때문이었을까, 여행지의 낯섦 때문이었을까. 선배는 당신의 대학 시절을 이야기했다. 




훤칠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성격, 뛰어난 말 주변으로 인기도 많고 학생회장까지 지냈던 선배는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많았다. 학생회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총장 사무실 앞에서 밤샘 투쟁을 한 것부터 야생마 같은 후배도 선배의 말만은 얌전히 따랐다는 것 까지.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의 결혼식 사회를 몇 번이고 섰다고 했다. 그리운 듯 자랑스러운 듯 지친 듯 즐거운 듯 털어놓는 선배의 모습은 소위 ‘라떼는 말이야’를 늘어놓았다고 치기에는 매우 복합적이었다. 인간적이고.


짐작컨대, 그는 술기운이 올라올 때면 자신의 가장 빛났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마치 대부분의 우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때 즈음 팀 내에서 선배의 위치는 애매했다. 팀장은 선배가 팀원들을 다독이는 동시에 감시하길 원했고, 팀원들은 그를 동료로서 좋아하면서도 팀장과 특별하게 가까운 사이라는 걸 인지하는 위치였다. 그런 상황에 놓인 선배로서는 동료들과 거리낌 없이 돈독하게 지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소 군기 잡기를 좋아하지만 앞뒤 얼굴이 다른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선배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빌어서 자신이 원래 선후배들과 돈독하고 진심을 나누는 사이였다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하고, 그걸 술기운에 무의식적으로 털어놨을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 빛나던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간의 격차로 선배는 지쳐 보였다. 그의 마음을 100% 이해한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때의 나는 5년 뒤의 내 모습이 선배와 닮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현실에 지쳐, 나의 가장 빛나던 모습을 추억하며 버티는 모습 같은 것. 




그리고 지금 5년이 지났다. 

5년 전의 나는 팍팍한 회사 생활에 지쳐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직 어리니까 이 또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었고, 5년 뒤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능동적으로 살아야지 하는 귀여운 다짐을 일기장에 꾹꾹 눌러썼었다. 그리하여 5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일기를 보며 후회가 남지 않냐고 한다면 당연히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 후회가 없을 수는 없지만 지나간 것이기에 뒤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뭐, 후회가 남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떨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역할했을 텐데 말이다.


그 선배는 현재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 애사심을 불태우며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회사를 옮겨 새로운 일을 배우며 매일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가끔 술에 취해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읊으며 사는 건 둘 다 같지 않을까?

추억이 현재를 살아가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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