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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r 03. 2019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를 찾아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회사를 다니기 딱 좋은 그 온도


닮고 싶은 선배가 있다. 

그녀는 항상 초연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응시하며 차분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이슈가 휘몰아치는 영업지원부서의 숙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은 홀로 태풍의 눈 속에 있는 듯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녀를 보면 그 문장이 떠오르곤 한다. 

뷰티 업계 중에서도 뛰어나게 수평적인 문화를 가진 브랜드에 몸 담고 있지만, 아무래도 영업 조직이다 보니 선후배 간에 뚜렷한 선이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예외다. 그녀에겐 모두가 단지 코워커(coworker) 일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끌어주고 당겨주는 선후배 간의 끈끈함을 모르쇠 하는 차가운 사람 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로 상대를 대하는 그녀는 나의 회사생활 롤모델 부동의 1위다.


입사 1년 차, 여느 신입이 그렇듯 환상과 현실의 괴리에 숨이 턱 막혀오던 순간에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팀에 있는 유일한 여자 선배였던 그녀는 차가 워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의외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두서없이 조각나 있던 고민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제 자리를 찾았다. 고민은 결국 '나는 퇴사를 하고 싶다. 왜냐, 지금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였다. 그녀가 말했다.


"관두고 뭐할 건지 뚜렷하면 퇴사해요. 그게 아니면, 회사는 일단 다니는 게 무조건 좋아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숨통이 꽉 조여있는 기분인데, 회사 다니는 게 무조건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는 이해가 안 됐다. 이러다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르는 기분으로 회사를 다니면 나를 갉아먹는 일 밖에 더 될까 싶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만 가득하던 차에 그녀가 덧붙인 말에 그제야 아, 했었다.


"퇴사까지 생각하는데 열심히 일할 필요 없잖아요. 적당히 하면서 다른 일 찾아봐요."




'적당히'라. 

잘해서 인정받겠다는 열정 가득한 신입에게, 특히 어정쩡한 완벽주의 성향의 개복치인 나에게, 그 단어는 굉장히 낯설었다. 회사가 적당히 다녀도 되는 곳이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나 순수했다.) 그런데 가만히 곱씹어 볼수록 백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퇴사까지 결심했으면, 어차피 퇴사할 거라면 뭐 그렇게 절박하게 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당장 관둬버리면 집에서 놀기밖에 더하랴, 적당히 힘 빼고 다니면서 돈 벌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실수하지 않으려 온 몸에 가시를 뾰족 세운 고슴도치처럼 일에 매달렸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조금만 공격당하면 당장이라도 빵 터뜨릴 것처럼 온몸을 부풀리는 개복치였는데, 누가 좀 찔러도 그랬냐 하고 마는 순둥이가 됐다. 왜? 적당히 하면 되니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오히려 일하기가 편해지는 거다. 부담은 덜어지고 여유는 늘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되면 해보는 거고. 그러니까 일이 또 재밌어졌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일 년을 더 다니게 됐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즐겁게 다니고 있다 지금 회사.




입사 1년 차의 나는 말하자면, 아주 뜨거웠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잘해보려는 마음만 앞서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으아아 거리며 불덩이를 이고 지고 다니며 손이며 얼굴이며 다 벌겋게 익어버린 상태였던 거지. 그녀는 내게 찬물에 몸을 담그는 법을 알려줬다. 너무 뜨거우면 오히려 다치니, 찬물로 좀 식히면서 천천히 가는 거다. 그렇게 좀 식으면 다시 일을 해보는 거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좋은 그 온도로 말이다. 


주기적으로 찬물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 

일을 하다 보면 멈추지 못해서 숨이 턱턱 막혀오지만 어정쩡한 완벽주의자인 나는 도중에 놓아버리질 못한다. 여전히 그렇다. 그럴 때는 의식적으로 '적당히 하자, 적당히'를 중얼거린다. 당장 해결해야 할 것처럼 붙들던 일들을 한 숨과 함께 내려놓으면, 신기하게도 하나씩 실마리가 보였다. 잔뜩 열이 올라 이것도 저것도 심지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까지 경우의 수를 세며 늘어놓던 걱정거리를 쓱, 책상 밑으로 밀어버리니,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답이 보였다.




언제나 초연한 자세로 노트북을 응시하며 차분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녀만의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는 법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익혔을 거다. 나도 머잖아 미지근한 온도가 디폴트 값이 되는 날이 있겠지.



# 배경은 Martin G. Sonnleitner: Picasso vs. Lichtenstein, 100x80 cm, Öl/Acryl-Leinwand,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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