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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공대생 Apr 27. 2020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김영하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은 걸까? 아니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을까? 아니면 어딘가 다른 엘리베이터에 끼어서, 텅텅거리며 남자의 몸을 치고 튕겨 나오기를 반복하는 엘리베이터가 주는 통증을 감내하면서, 아직도 육층과 오층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훅 빠져들어 읽었던 건 단연 표제작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이다. 주인공은 회사에 출근하려다 엘리베이터에 끼어 육층과 오층 사이에 걸쳐진 사람을 발견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본체만체 지나치는 사이 갈등하던 주인공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튀어나온 남자의 발을 건드려본다. 남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주인공은 자신도 회사에 늦었기에 내려가면서 경비에게 말하거나 119에 신고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계속해서 평범한 일상에 생기기 힘든 일들이 겹친다. 핸드폰이 없는 주인공이 119에 신고하기 위해 핸드폰을 빌리려 하지만 아무도 빌려주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끼었다는 남자의 말은 더더욱 믿어주지 않는다. 체념하고 회사에 가서 119에 신고하기 위해 버스를 탄 주인공. 그러나 버스는 사고가 나고 다음으로 탄 버스에서는 주인공이 치한으로 몰린다. 결국 주인공은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30분을 달린 뒤에야 회사에 도착한다. 그러나 아침에 면도기가 부러질 때부터 느꼈던 불운은 주인공이 다른 여직원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가 멈추게 만들고 만다. 회사에 늦고, 멈춘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겨우 탈출했지만 구두를 잃어버리고, 부서 회의에 늦은 데다 신랄하게 까이고. 하루 종일 온갖 불운을 겪은 주인공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확인하지만 육층과 오층 사이에 끼어있던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남자는 궁금해한다. 도대체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기묘한 현실의 판타지는 시작부터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김영하 작가는 이런 작품을 참 잘 쓴다. 현실에 무언가 핀트가 어긋난 비현실을 툭 던져 넣고는 나는 비현실이나 판타지 따위 생각도 해본 적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뒤섞임이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표제작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누가 봐도 비현실적인 일들을 그럴듯한 현실로 포장한다.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끼어 있어 목숨이 위험하다면 119에 신고하는 게 당연하지만 출근에 바쁜 사람들은 아무도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주인공도 자신의 출근 시간이 바빠 119에 신고해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떠난다. 그 뒤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도 주인공의 난처한 상황이나 불운한 사정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한 명쯤은 관심을 보일 법도 한데 말이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혔던 여직원은 주인공의 희생으로 탈출하고도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는 주인공의 사정을 경비에게 알리는 간단한 일조차 하지 않는다. 온갖 불운으로 거지꼴이 된 주인공의 행색을 본 부서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팅에 늦은 주인공의 시간관념과 부족한 주인공의 발표 내용을 질책한다. 현대인도 이런 현대인들이 없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철저히 신경 쓰지 않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안온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극단을 달리는 사람들만이 출현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이미 우리의 세상은 이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 아닐까. 내가 알지 못하는 시야 밖에서는 이런 일들이 이미 팽배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슴 한편에 의문들과 함께 생겨나는 불안감이 씁쓸했다.


엘리베이터는 첨단과 현대를 상징하는 기계다. 계단을 오르내린다는 다리 아프고 힘든 일을 기계의 힘으로 단숨에 해결해주는 기술의 편리함을 과시한다. 그 사이에 낀 남자는 첨단과 현대의 상징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그런 남자를 지나쳐가는 수많은 현대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발길을 멈춘다. 현대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주인공의 관심은 주인공 또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 앞에서 멈춰선 모습이나 출근하는 중에도 남자가 못내 마음에 걸려 119에 신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힌 여직원을 자신의 희생으로 탈출시켜주면 그녀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 모습 등을 보면 알 수 있다.(이 소설에 나오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물들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직원을 자신의 희생으로 탈출시키는 일은 아마 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남자가 아직 완전한 현대인으로 진화(?)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남자는 그 불운한 하루의 끝에 엘리베이터에서 사라진 남자의 행방을 궁금해한다. 도대체 그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된 건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해 경비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수많은 현대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목격한 동족이어서가 아니었을까. 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와 자기 자신이 전부인 현대인과 정반대로 남을 걱정하는 주인공. 언젠가 주인공도 엘리베이터에 끼어 죽어가는 남자처럼, 현대인들 사이에 끼어 서서히 생기를 잃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번 리뷰에서는 표제작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 얘기만 줄곧 늘어놓았지만 다른 작품들도 눈길이 가는 작품이 꽤 많았다. 번개를 맞기 위한 동호회라는 설정 자체가 한없이 특이한 <피뢰침>이나 당신이라는 말로 주인공을 지칭하는 2인칭 소설의 형식을 띤 <당신의 나무>, 주인공 자체가 아니라 그의 직업과 벌어오는 돈만을 보는 가족과 지인들 사이에서 점점 투명인간으로 변해가는 남자를 그린 <고압선> 등등. 김영하 작가의 특이하고 삐딱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어찌 됐든 일단 표제작이 너무 재밌으니 읽어보시길. 그 한 편만으로도 이 소설집에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 속 한 문장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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