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이다.
"선생님, 저 00입니다. 잘 계셨죠? 저 **초등학교에 발령받았습니다."
"뭐라고? 정말이야?"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께 전화하기]
임용 합격 후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간 선생님을 찾지 않은 건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오늘의 나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부인할 수 없던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
전교회장을 한의원집 아들에게 양보하자는 담임선생님의 설득(?)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한 것도 불운이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교사를 꿈꾸었던 건
게다가 차별하지 않은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우리 선생님이 나빴던 선생님을 모두 물리칠 만큼의 강력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밝은 아이인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리더십이 있는 아이인 줄 알게 되었다.
학급 리코더 연주 대회 우승자에게 그 당시 3만원하는 원목 수입 리코더를 준다는 선생님말씀에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리코더 연습을 하며 내가 목표의식과 열정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해의 나는 참 사랑스럽고 멋진 아이였다.
그 해의 경험과 기억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선생님과 제자로,
동료 교사로 선생님과 만남을 이어갔다.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내가 얼마나 학급 경영을 잘하고 있는지, 내가 교사로서 어떤 고민이 있는지.
그렇게 한 해, 한 해가 지나며 선생님을 뵈러 가면
선생님은 내가 승진의 길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더 궁금해하신다.
난 아직 그 길에 대한 관심의 문을 열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내가 아이들과 함께하며 좋은 교사가 되기보다 빨리 준비해서 승진하길 바라시나 보다.
내가 승진을 준비하지 않거나, 혹은 못하면 선생님께서 실망하실까...
고민이 되었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 오해를 푸는데 13년이 걸렸다.
"00야, 선생님은 이 자리에서 참 많은 경험을 했거든. 내가 옮겨가는 자리는 늘 새로운 경험이야. 선생님은 이 경험들이 참 좋다. 그래서 내 제자인 너도 이런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선생님은 00가 교감도 해보고, 교장도 해보고 또 장학사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던 마음 깊이 담아둔 질문을 선생님께서 알아채신 듯
먼저 말씀해 주셨다.
단순히 어떤 자리에 오르는 제자의 모습을 바랐던 게 아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길 바라셨던 거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
우리 선생님은 긍정적이고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분이다.
그래서 어떤 불만이든, 투정도 선생님 앞에선 무능한 사람의 넋두리가 된다.
어려움도 참고, 인내하라고 배웠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더 단단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가장 단단했을 때는 오히려 10~20대였던 것 같다.
40대가 되니 생각할 것도 많고, 소위 성질대로 행동하는 게 어렵다.
다시 말해 결국 참아야 할 일이 많다.
최근에 한 사람의 무례한 행동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받은 이 무례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런데 너무 열받는다.
자존심 상한다.
백 번 넘게 고민했다.
결국 '참는 것'으로 나를 설득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오른쪽 볼이 경직됨이 느껴졌다.
한의원에 갔더니 안면마비가 오는 걸 수도 있다고 했다.
예상이 맞았다.
"최근에 힘든 일 있었어요?"라는 한의사의 말에
처음 보는 한의사 앞에서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괜찮아질 겁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치료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참자. 지나가자. 상대하지 말자.
그렇게 한 달 전 약속한 선생님과 만나는 날이다.
"여보, 당신 아직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응, 선생님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나는 안 마실게."
그렇게 남편과 함께 선생님을 찾았다.
식당에 도착해 남편이 주차하러 간 동안 선생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선생님 제가 오늘 술을 마시기가 어렵습니다."
눈으로 이유를 묻는 선생님께
자세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안면마비가 올 뻔했어요. 어제까지 치료받았어요."
딱 이만큼만 말씀드렸다.
선생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묻지도 않으신다.
나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굳음이다.
'단단하게 잘하는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선생님처럼 긍정적으로 뛰어난 문제해결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요.'
'선생님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원하는 자리에 가려면 참으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참기가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차마 말로 꺼낼 수 없었다.
예상치 못했다.
"잔 받아라."
"네?"
"00야! 참지 마라!"
"참지 마라"
"니가 왜 참아야 해? 참으면 니 병난다. 왜 그래야 하는데?"
"참지 마"
눈물이 차 올랐다.
"니 선생님한테 배웠잖아? 선생님이 참지 마라고 잘 가르쳤제?"
"네!"
"참지 마라. 알겠제?"
죽기야 할까.
얼굴 돌아가면 뭐 이참에 좀 쉬지.
많이... 마셨다...
그러나 그날 내 얼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얼굴이 굳지 않았다.
출근이 두렵지 않았다.
그 공간에 있는데 심장이 떨리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 말씀대로 참.지.않.았.다.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무례한 행동이었음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아니 당신의 행동은 폭력적이었다고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제자가 어떻게 참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거다.
서로 호탕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통화를 마쳤다.
숙제 검사를 받고, '참 잘했어요'도장을 받은 기분이다.
그렇게
선생님과 나 사이에 오해가 다 풀렸다.
나는 왜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참지 말라는 말을 못 했던 것일까.
내 가족이, 내 친구가 나에게 힘듦을 말한다면
꼭... 말해줄 거다.
"참지 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