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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콩 9시간전

달의 꼬리 섬과 찬란한 강의 섬을 산책했어

월미도와 강화도


  봄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어느 토요일, 연수생 열여섯 명과 '읽걷쓰 프로젝트' 담당자 두 명과 버스 기사 한 명은 강화도로 떠났다. 우리는 이른 아침 인천광역시교육청에 모여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교육청에서 출장을 나온 선생님 두 분이 오늘 진행될 프로그램의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으며 저번 수업 시간에 받은 종이를 펼쳐보았다.


[인천을 읽다, 걷다, 쓰다 - 강화도 기행]
- 작가와 함께 작품 속 배경지 걷기

주제 1) 두근두근 책길을 따라 걷다

1. 양도초등학교 도착. 김중미 작가와 함께 산문마을 느티나무길 걷기
2. 이동
3. 점심식사. 연잎정식과 꽃차. 수국정원 산책하기
4. 이동

주제 2) 도란도란 문학길을 따라 걷다

1. 바람숲그림책 도서관 관장님과 북토크
2. 바람숲그림책 도서관 산책하기
3. 간식: 소금빵 샌드위치와 청귤 아이스티

#과제) 포토 에세이에 쓸 사진 찍기


  나는 ‘통솔당하는 사람’이 된 것이 무척이나 설렜다. 2학년 담임이었을 때 잦아들던 코로나가 갑자기 기승을 부려 제주도 수학여행이 취소된 적이 있다. ‘통솔하는 사람’이 될 예정이었던 나는 단 한 톨의 아쉬움도 느끼지 않았다. 열여덟 살 여자아이 서른두 명을 2박 3일 동안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동그랗고 투명한 구슬 같아서 어른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단단하고 평평한 곳, 예를 들면 책상 위 같은 곳에 가지런히 모아두면 어느새 이리저리 굴러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구슬이 자기 갈 길을 찾아 아예 떠나버리기 전에 살살 구슬려 다시 책상으로 이끄는 것이 담임의 임무였다. 학교에서도 이런 형편인데 이들을 제주도 들판에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막막했다. 그러던 와중에 취소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어떻게든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던 학생들의 반발은 무척 컸다.

“아, 왜요! 가기로 했잖아요. 줬다가 뺐는 게 어딨어요. 입고 갈 옷도 이미 샀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들의 열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자연재해와도 같은 전염병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종례 시간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안타까운 비보를 전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용히 기뻐했다. 그리고 지금, 불과 반년만에 다시 통솔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었다. 간사하게도 다시 학생의 입장이 되니 우리 반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만약 ‘작가와 함께 작품 속 배경지 걷기’ 행사가 갑자기 취소됐다면 나도 학생들처럼 격하게 아쉬워하며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아, 왜요! 가기로 했잖아요. 줬다가 뺐는 게 어딨어요. 들고 갈 양산도 이미 샀단 말이에요.”

  다행히 강화도 기행은 무사히 시작되었다. 남동구 구월동에서 북서쪽으로 40분쯤 가니 초지대교가 나왔다. 다리를 넘어 20분쯤 더 달리니 강화도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이름 그대로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두 다리가 육지와 섬을 잇고 있다. 인천과 바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나는 인천 토박이인데도 불구하고 소래포구와 마찬가지로 강화도와도 초면이었다. 우리 가족은 집에서 가까운 월미도를 자주 갔다. 엄마, 아빠, 나, 동생까지 네 식구가 아빠 차를 타고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면 빠르면 20분 늦으면 30분 안에 월미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차를 주차장에 댄 뒤 유원지를 후다닥 지나쳐 한적한 ‘월미 문화의 거리’로 직진했다. 엄마는 유원지의 무지막지한 놀이기구를 두려워했다. 

  실제로 월미도 바이킹은 지나치게 심플한 안전장치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미친 속도와 각도로 악명이 높았다. 인심이 후해서 기계 작동 담당자의 기분이 좋으면 유령선처럼 누구 하나 기절하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유원지를 못 본 척 지나쳤던 나는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전설의 바이킹을 타 보았다. 에버랜드에서 회전목마가 무섭다고 했다가 함께 갔던 그에게 어이없다는 눈빛을 잔뜩 받은 적이 있다. 이렇게 스릴 있는 놀이기구와 영 인연이 없었는데 갑자기 속에서 어떤 객기가 발생했던 건지 지금도 알쏭달쏭하다. 하여튼 전설은 전설인 이유가 있었다. 나는 두려움이 사람을 죽이지는 못한다는 사실과 이제 국내의 모든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배에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환희를 극대화하는 거대한 쾌감이 있었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하지 말라고 하는 짓은 다 하고 다닌다며 한바탕 잔소리를 할 것이다. 엄마에게는 자식이 동그란 유리구슬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방심하면 어디론가 떼구루루 굴러가 상처 입고 다시 또르르 굴러들어 와 괜히 속상하게 하는 그런 존재.


진정한 전사의 후예들을 위한 바이킹. 마음을 단단히 먹고 탑승해야 한다.

  

 

  월미 문화의 거리 앞에는 바로 바다가 있었다. 서해의 석양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태양은 바닷물에 서서히 몸을 담그며 주위를 분홍빛과 주황빛으로 따듯하게 달구었다. 지는 해에서는 점성이 느껴진다. 용암처럼 끈적하게 활활 타오르다가 바다에 빠질수록 점점 단단하게 굳어간다. 거의 다 잠긴 해의 끄트머리는 계란 노른자처럼 볼록 솟아올랐다가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황홀한 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완연한 어둠이 찾아오면 희미했던 달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달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야 눈에 띈 것이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멀리서 별처럼 점점이 반짝였다. 바다 하면 왠지 일출을 보러 가야 할 것 같지만 나는 바다에 일몰을 보러 간 적이 더 많다.

  서해는 바위가 많고 파도가 거칠다. 월미도에는 해변 대신 방파제가 있고 모래사장 대신 높은 돌계단이 있다. 돌계단 주위에는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투명하고 단단한 펜스가 둘러져 있다. 돌계단은 바다와 거리를 잇는 통로였다. 겁 없는 낚시꾼들이 돌계단을 내려가 바위 사이에 자리를 잡은 모습을 종종 보았다. 밤바다는 검푸른 회색이었다. 바닷속에는 한 번 빠뜨리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하는 컴컴한 어둠이 있었다. 어둠 속 존재의 심기를 거스르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돌계단 근처에 갈 때마다 바로 옆에 박힌 경고문 속 금지 표시가 빨갛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곧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바이킹을 탈 용기는 있었지만 돌계단을 내려갈 시도는 아직까지 해 본 적이 없다.


  어쩌다 보니 강화도에서 월미도로 이야기가 샜다. 샌 김에 이름의 유래를 한 번 찾아보았다. ‘월미(月尾)’는 ‘달의 꼬리’라는 뜻이다. 지식백과에 따르면 섬의 생김새가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진 데에서 유래했다. 딱 맞는 이름이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유령특구’가 되어가고 있는 서글픈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해도 아니고 달, 달의 몸통도 아니고 꼬리라니. 처연하고 아름답다. 그래도 월미도에서는 언제든지 찰랑이는 바다를 볼 수 있다. 내 기억 속 바다는 늘 방파제 너머로 밀려왔다 멀어지는 짙고 거센 물결의 순환이었다. 모래사장이 없으니 물이 빠져나간 간조 때에도 바위가 더 드러날 뿐 바다는 여전히 청량했다. 그래서 소래포구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해안을 보았을 때 더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마치 예고 없이 내 안의 진흙탕을 맞닥뜨린 것처럼.

  내친김에 소래포구 속 ‘소래(蘇萊)’의 뜻도 찾아봤다. 과거 냇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해 ‘솔내(松川)’로 불리다가 소래가 되었다는 설,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 소래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지형이 좁다는 뜻의 ‘솔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설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음수대와 전망대까지 새우 모양이고 황금꽃게상이 자랑스럽게 집게발을 쩍 벌리고 있는 곳이니까 이름에 소라까지 있으면 더 완벽하지 않을까. 

  강화(江華島)는 ‘찬란한 강’이라는 뜻이다. 소래포구도 월미도도 강화도도 다 물과 관련된 지명이 붙었다.(밀물과 썰물은 달의 영향을 받으니 '달의 꼬리'도 물과 연관이 있다고 우겨본다.) 옛 지명은 직관적이면서도 아름다워서 좋다. 인천()은 '어질고 자애로운 내'라는 뜻이다. '내'는 시내보다 크지만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다. 인천광역시에 강화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름만 놓고 보면 인천이 강화보다 소박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인천'을 검색하다 엄청난 사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소래포구뿐 아니라 소래산도 있다고 한다. 한자가 같다. 소래포구와 소래산은 도보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이름의 유래가 같았다. 이제 그만 알아봐야겠다.


월미도

  찬란한 강의 섬은 달의 꼬리 섬보다는 멀리 있었지만 생각보다 가까웠다. 버스 기사님은 양도초등학교에 운동장에 주차를 한 뒤 우리를 내려주었다. 학교 정문에는 김중미 작가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미닭의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처럼 16명의 수강생과 2명의 담당자가 작가님의 뒤를 타박타박 쫓아갔다. 오전 10시 31분이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하늘에 뜬 뭉게구름 뒤로 빛이 옅고 넓게 퍼져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린 명화 속 구름 같았다. 왜 위급 상황에서 신들이 구름을 보내 아끼는 사람을 가려주었는지 알겠다. 저 정도 퐁실함이면 정말 사람이 숨어도 모를 것이다. 저 멀리 작가님이 보였다. 작가님의 파마머리도 구름처럼 몽실몽실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한 세계의 근원이 된 섬에 도달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제멋대로 이리저리 구르는 마음을 다잡고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문학이라는 구름 속에 있는 힘껏 숨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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