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쓰는 법
<읽고, 걷고, 쓰기 프로젝트>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최종 목표인 ‘쓰기’를 위해서는 먼저 많이 보고 듣고 읽어야 했다.
세 번째 강의가 시작됐다. 슬로보트 김순지 작가님께 '포토 에세이 쓰는 법'을 구체적으로 배울 차례였다. 첫 번째 주제는 ‘사진’이었다.
“카메라가 없어도 되냐는 질문을 많이 하세요. 요즘에는 스마트폰 카메라 화질이 워낙 좋아서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우선 이것저것 자유롭게 찍으며 감을 익혀보세요. 쌓인 사진들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시간대, 장소,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요. 그렇게 ‘나’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내가 기록하고 싶은 분위기와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제가 된답니다.”
“저는 사진을 잘 못 찍는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글과 어우러지는 사진이면 다 괜찮습니다. 심지어 사진과 글이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좋아요. 나만의 의미가 담겨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사진만으로 전달이 안 되는 부분은 글로 풀어쓰시면 됩니다. 너무 잘하려는 부담감을 내려놓으세요.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놓아 보세요.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완성이 되어 있을 거예요.”
작가님은 사진, 그림, 글, 편집, 배열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작업한 독립 출판물 <섬광> 속 몇 페이지를 예시로 보여주었다. 기억에 남는 한 장이 있다. 한 아버지와 아이의 뒷모습이었다. 작가님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아이폰6로 찍은 사진이라 소개했다. 사방이 트여있는 높다란 전망대에서 검은색 코트를 입은 아버지가 어린 자식의 허리를 붙잡고 넓게 펼쳐진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는 잔뜩 신나 있었다. 분명 멈춰있는 장면인데도 꿈틀대는 손가락과 꿍실대는 엉덩이가 느껴졌다. 저 멀리서 아름답고 우아한 프라하의 오래된 건물들이 가족을 감싸안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 한 장에서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어요. 다양한 관점에서 찍어보세요.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반대로 롱 숏으로 먼 풍경을 담기도 하는 거예요. 우선 많이 찍어놓으면 고르기가 더 쉬워요.”
“작가님은 사진을 너무 잘 찍으셔서 쉬웠던 게 아닐까요.”
선생님 한 분이 처연하게 한 마디를 얹었다.
다음 주제는 ‘글’이었다. 사실 이쪽이 더 문제였다. 사진은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퀄리티를 따지지 않는다면) 1초 만에도 찍을 수 있고, 후보정으로 적당히 만족스럽게 꾸밀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은 첫 단계부터 완성까지 모든 걸 직접 한 땀 한 땀 새겨야 했다. 전문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어플로 보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검색하면 바로 여러 사전에 실린 뜻을 알려주는 웹 사전과 몇 번 클릭하면 자동으로 단어를 바르게 수정해주는 맞춤법 검사기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저번 시간에 국어를 가르친다고 나를 소개한 것이 엄청난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다른 선생님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내 글에 큰 관심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주의 깊게 읽더라도 모두가 초보인 상황이니 가혹한 비판을 가하지 않을 것도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자꾸만 뒷걸음질 쳤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일하는 오호호 선생님과 딸기달 선생님에게 본격적으로 쓴 진지한 글을 보여드린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글감을 찾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질문을 던져 보세요. 지금 나에게 유행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최근 관심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나와 주변과 세상에 대해 깨달은 작은 사실이 있는지 일상을 되짚어보세요. 삶이나 인생에 대한 고찰도 좋고, 생활 속 소소한 일들도 좋아요.”
작가님은 예시로 김예지 작가의 <저 청소일 하는데요?>와 김진아 작가의 <잘자요가>, <슬퍼요가>, <화가나요가>와 같은 책들을 소개했다. 첫 번째 책은 27세부터 4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청소일에 뛰어든 경험을 만화 형식으로 그려낸 에세이였다. 두 번째 시리즈는 상황별, 감정별로 하기 좋은 요가 자세를 러프하면서도 귀여운 손그림과 함께 소개하는 책이었다.
“내가 하는 일, 빠져있는 것, 나에게 인상적인 것을 친한 친구에게 소개한다고 생각하면 더 쉬울 거예요.”
이때는 내가 ‘분노와 타협’ 단계로 넘어왔을 때였다.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단연 일방적 이별로 인한 고통이었다. 슬프고 처량한 이야기도 글감이 될 수 있을까.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을까. 질문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다른 선생님이 손을 드셨다.
“부정적인 내용을 써도 되나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막막하고 절망적인 감정이나 사건이요.”
“아물지 않은 상처를 표현하는 건, 사실 쓰는 사람이 많이 힘들어요. 아직 정리가 안된 너무 아픈 이야기는 자학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하지만 완결된 한 편의 내용으로 누군가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에세이가 될 수 있어요. 부끄럽고 슬프지만 둘러앉아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힘을 불어넣어 준답니다.”
글감 선정과 내용 구성 다음으로는 글의 형식이었다.
“산문, 시, 편지, 인터뷰, 여행기 등 형식은 자유롭게 선택하시면 됩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그림책 구성도 좋아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일지 구상해 보세요. 너무 많이 고민하고 망설이지 마세요. 꽂히는 내용과 형식이 있다면 우선 초고를 써보세요. 글을 묵혔다가 읽으면 편집점이 더 잘 보인답니다. 그러니 퇴고할 시간이 충분하도록 시간을 잘 나눠서 작업하셔야 합니다.”
강의 내용을 열심히 노트에 적는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실제로 글을 써볼까요? 짧게 서너 줄 정도 쓴 다음 한 분씩 발표해주세요. 다함께 들어 봐요.”
무엇에 대해 쓸지 고민이 됐다. 짧게 써야 하니 가벼운 주제여야 할 것 같았다.
<내 안의 최신 유행 목록>
- 점심시간에 국어과 연구실에서 글적라이프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커피 타임:
핸드드립 커피 내리는 법, 그라인더, 드리퍼, 주전자, 커피콩
(오호호&딸기달 쌤은 산미가 적고 고소한 다크로스팅 원두 취향. 나도 똑같아서 다행이다!)
- 며칠 전에 새로 바꾼 안경(자다가 집에 불이 나면 1순위로 챙겨야 하는 물건) :
안경테, 안경알, 안경닦이(몇 장이나 가지고 있지?)
- 6월에 공무원 시험을 앞둔 친구 임시주에게 쓰는 응원 편지:
합격하기 전까지 자발적으로 영원히 고3에 갇혀버린 공시생과 고시생의 서러움
- (봄이 되어 주변이 파릇파릇하니) 꽃과 나무 종류에 해박한 딸기달 선생님 인터뷰
-자취생이 겪는 온갖 초보적 사건사고들(아직 두 달 밖에 안 됐는데 에피소드가 잔뜩 쌓임)
머릿속을 탈탈 털어보니 제법 다양한 주제가 나왔다. 하지만 사실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진한 자국을 남긴 건 어젯밤에 꾼 꿈이었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동네에서 그와 만나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갔다. 그리고 같이 집에 왔다. 나는 그에게 지난밤 꿈속에서 우리가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놀렸다.왜 그런 꿈을 꾼 거야. 내가 더 잘할게. 그리고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나에게 무척 잘해주었다. 그건 그의 최선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총 두 번 크게 싸웠는데 그때마다 그는 이미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있다고, 여기서 더 바뀌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더 나아지겠다고 하는 그는 내가 뭉쳐낸 허상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었다. 꿈인 걸 알았다. 그는 여전히 내 곁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 깨는 것이 두려웠다. 그의 손을 놓고 도망쳤다. 집에서 나가야 했다. 내가 먼저 떠나야 그가 나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현관문을 열자 다른 방이 나왔다. 방 안엔 책과 신문이 가득 쌓여있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신문이 점점 늘어났다. 나는 그대로 방 한가운데에 못 박혔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꿈을 꾸는 내 무의식이 미웠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베갯잇이 축축했다.
의식의 세계로 넘어온 뒤로도 아직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아 멍하니 누워있었다.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타겟으로 삼은 사람처럼 무력하게 당한 기분이었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주인공 코브는 특수 기계를 사용해 타겟의 꿈에 들어가 공사를 친다. 자기들이 지어낸 메세지를 교묘하게 심어 타겟이 내릴 결정을 뒤바꾸는 것이 목표다. 타겟은 그 메세지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꿈에 농락당했다는 게 어이 없었다. 베개가 계속 젖고 있었다. 잠옷으로 입은 티셔츠가 목 부분까지 축축했다.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식장에서 쓰러질 것 같다가도 밥 먹고, 잠 자고 다 했어. 산 사람은 그래도 계속 살아가야지 뭐 어쩌겠어.”
이 순간만큼은 갈 곳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정신없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축복처럼 느껴졌다. 온몸을 적셨다 말리니 마음이 깨끗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 손잡이를 조심히 밀었다. 문이 무사히 열렸다.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진 익숙한 복도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아파트를 떠났다. 땅을 딛고 서서 바깥 공기를 마시며 아침 햇빛을 맞았다. 비로소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의식의 세계에서 이별 행사를 모두 치렀다. 이 정도면 통과 의례를 충분히 겪은 것 같다. 이제 그만 무의식 속에서도 그를 떠나보내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증오하고 포기하고 다시 사랑하는 굴레를 끊고 싶었다.
결국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짧은 글과 작년 여름 퇴근길에서 느낀 감정에 대한 시를 썼다. 6월이 다가올수록 날씨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어 벌써부터 여름이 걱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습기에 취약하다.
요즘 하늘이 참 파랗다. 흰 구름이 동동 떠 있다. 아무리 햇볕이 따가워도 고3이어도 남자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 엄청난 체력과 뜨거운 열정을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 죄다 쏟아붓고 수업 시간에는 꾸벅꾸벅 존다. 열심히 깨워도 금방 고꾸라진다. 가끔은 오히려 늘 똘망똘망한 학생이 신기하다. 선생님도 수업이 빨리 끝났기를 기다린다는 걸 아이들은 알까?
어느 기간제 교사의 퇴근길
너무 뜨겁고 버거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발밑 그림자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지
지칠 대로 지친 후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거야
아 그때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구나
짧은 발표 뒤에는 박수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학교 이야기가 가장 많았고, 가정과 자녀에 대한 주제가 그 다음이었다. 예술을 하고 싶은 열정, 반려동물에 대한 글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께서 상실의 아픔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보다 훨씬 용기 있는 분이었다.
모든 발표를 듣고 난 뒤 작가님은 수강생들이 모두 글을 잘 쓴다며 기뻐했다.
“여러분, 오늘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계속 곱씹는 기억이 나를 이루는 뼈대가 됩니다. 저는 책을 출판하고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어요. 물성이 있는 것으로 추억을 정리해서 내보냈을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꼭 글을 완성해서 해방감과 성장했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