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르 인생관>
인천광역시교육청에서 주최한 '작가와 함께하는 읽걷쓰(읽기, 걷기, 쓰기) 프로젝트'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됐다.
느리게 가는 작은 배. ‘슬로보트(Slowboat)’라는 필명을 쓰는 김순지 작가님은 알사탕같이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안경알을 뚫고 뒤쪽에 있던 나에게까지 닿을 정도였다. 북구도서관 겨울 강의실에 앉아있던 교사들 앞으로 작가님이 힘차게 걸어 들어오자 어색했던 공기가 창밖 계절처럼 순식간에 따듯해졌다.
작가님은 본인을 ‘북극서점’의 주인이자 <고르고르 인생관>의 작가라고 소개하셨다. 원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반복되는 하루에 지친 어느 날 과감하게 학교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교대 졸업장, 임용고시 합격, 13년 동안 쌓인 경력을 뒤로하고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를 향해 훌훌 날아갔다는 작가님의 이야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 학교는 아주 단단한 집단이다. 정해진 틀을 깨는 것이 불가능하다. 수많은 아이들을 매일 8시간 동안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공기관의 특성이니 이해가 되긴 한다. 학교는 방공호 같은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속한 이들을 답답하게 한다. 그래서 다들 졸업할 때 아쉬워하기보다 홀가분해 하나 보다. 내 제자들은 졸업식 날 나를 보고 30초 정도 눈물지으며 함께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식이 끝나자마자 깡총거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작가님은 공교육에 다섯 번째 졸업을 선언했다. 많은 이들이 지금은 N잡이 필수인 시대라 한다. 하지만 안정적인 전문 분야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로 뛰어들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작가님의 용기와 결단과 추진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편으로 교육청이 작가님과 협업하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작가님이 운영하는 ‘북극서점’은 독립서점이었다. 나는 ‘독립서점’이라는 단어를 이때 처음 들었다. 새로 알게 된 표현이나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카톡 '나와의 채팅'에 메모를 해두었다가 꼭 국어사전에 검색을 해본다. 나중에 찾아보니 ‘독립서점’은 아직 하나의 단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독립(獨立)’과 ‘서점(書店)’ 검색 결과가 각각 떴다. 이용자들이 직접 등록하는 오픈사전을 찾아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독립 영화처럼 대규모 회사나 큰 유통망에 의지하지 않고 서점 주인이 취향대로 꾸민 작은 서점’이라고 한다. ‘동네서점’ 사이트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924개의 독립서점과 442개의 도서관이 있었다.(2024년 11월 기준) 내가 아는 서점은 교보문고, 예스 24, 알라딘 말고는 문제집을 사러 갔던 동네 서점 정도가 다였다. 임용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다양한 책을 멀리한 사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포토 에세이 쓰는 법’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기 전 작가님은 우리에게 책을 한 권씩 나눠주었다. 표지에는 둥글둥글한 노란 고양이와 회색 고양이가 풀밭에 나란히 앉아 바다 냄새를 한껏 맡고 있었다. 모든 선생님들 앞에 고양이 두 마리가 무사히 도착하자 강의실 앞쪽에 프로젝터가 켜지고 흰 스크린 속 화면이 점차 선명해졌다.
“<고르고르 인생관> 속 등장인물, 고양이이니 등장동물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르’의 실제 모델인 저희 집 금동이예요. 나이는 11살이고, 고향은 제주도랍니다. 먹보, 수다쟁이, 애교왕이라는 특징이 있고요. 별명은 식물파괴범, 인형 사냥꾼, 축구왕이에요. 좋아하는 음식은 참외, 곶감, 순대 간이에요.”
이불에 푹 파묻힌 아깽이 시절부터 어느새 애착 인형보다 덩치가 커진 묘춘기 시절, 상자 속에서 분홍색 혀로 입맛을 다지고 있는 최근 모습까지 사진이 한 장 한 장 떠올랐다. 금동이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수강생들의 반응도 점점 뜨거워졌다.
“어머, 귀여워라!”
나와 나란히 앉은 딸기달 선생님이 파워포인트 화면을 한가득 채운 금동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내 뒤쪽에 앉아 보이지 않았지만 오호호 선생님도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집에서 부장님을 기다리고 있을 삼색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과 투명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도 사랑하는 이에게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작지만 큰 존재가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오호호 선생님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저희 집 금동이를 관찰하다가 ‘사랑하는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제 이십 대에서 삼십 대는 내가 얼마나 모자라고 얼마나 결핍되어 있는가를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내가 나의 유일한 보호자인데 돌이켜보니 그동안 ‘나’를 충분히 보살피지 못했더라고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가치관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편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책 속 노란색 고양이 ‘고르’는 하늘에서 ‘고양이 언니’를 만난다. ‘얼마 전까지 많이 아팠는데 이제 다 나았나 봐. 신기하다.’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고르에게는 지병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양이 언니는 땅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며 일을 모두 마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고르는 우체부 모자를 쓰고 편지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길을 떠난다.
약봉투, 다 먹은 백숙 그릇, 돗자리 위에 살포시 놓이는 귀여운 발자국이 찍힌 편지. 고르는 기관사, 의사, 이웃집 고양이, 버스 운전사, 뱃사공이 되어 혼란스러운 마음에 울적해진 이들에게 편지를 내민다. 편지 속에는 각자 마음속에 소중하고 비밀스럽게 키워왔던 진실과 그들이 되고 싶었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쓰여있다.
“부록으로 동그랗게 뜯을 수 있는 카드가 들어있어요. 그 카드로 ‘인생관 게임’을 할 수 있답니다. 지금 같이 해볼까요?”
카드는 총 24장이었다. ‘공동체 만들기, 마음의 평화, 존경과 명예로움, 독특함과 개성, 야망과 성취감, 여행과 모험, 재미와 유머’ 등 가치관과 관련된 다양한 키워드가 고양이 그림과 같이 적혀있었다. 작가님이 안내하는 순서에 따라 카드를 이리저리 옮기다 보니 인생이라는 조각배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다섯 장이 남았다.
긍정적이고 강한 마음
잘 맞는 사람과의 우정
호기심과 열정
원하는 것을 창작하며 살기
예술을 즐기기
그가 떠나가지 않았다면 ‘진실한 사랑’이나 ‘화목한 가정’을 끝까지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어떤 카드를 뺐을까? 조각배에 원하는 만큼 많은 카드를 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수록 배는 점점 무거워진다. 경험상 감당할 수 있는 무게 이상 실어버리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진다.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다섯 장 고르기가 은근 힘들죠? 매번 인생관 게임 진행할 때마다 다들 머리를 부여잡으시더라고요. 그래도 이 모든 고민이 나의 진짜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여겨주세요. 다 고르셨으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서대로 카드를 나열해보세요. ”
작가님이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각자 어떤 인생관 키워드를 선택했는지 들어볼까요? 말씀하실 때 간단한 자기소개도 함께 부탁드려요.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어요. 이 게임을 여러 번 진행하면서 알게 됐는데 인생관이 완벽하게 겹치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가끔 영혼의 쌍둥이 같은 분들도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중요도 순서까지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 건 훨씬 더 어려워요. 이렇게나 다른 여러분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 순간이 참 기적 같지 않나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다 보면 새로운 친구가 생길 수도 있을 거예요.”
새학기 자기소개 시간처럼 우리는 한 명 씩 일어나 인사를 하고 인생관을 발표했다. 한 과학 선생님의 인생관이 기억난다.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택한 인생관은 지식의 탐구, 자연의 아름다움, 정의와 평등, 원하는 것을 창작하며 살기, 정신적 성장이에요."
작가님 말대로 16명 중에서 다섯 개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가치관이 하나 있었다.
원하는 것을 창작하며 살기
담당 과목, 학교, 출신, 나이, MBTI도 전혀 다른 이들이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피곤이 가득한 화요일 오후 5시에 한 자리에 모여있었다. 하나하나 정성껏 고른 가치관을 수줍게 말하는 선생님들은 서로를 직장 동료로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생각보다 이과 계열 선생님의 수가 많은 것도 놀라웠다. 저마다 연수를 신청한 이유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의미 있는 주제를 찾을 수 있을까?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 무사히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내가 통으로 한 권을 쓰는 것도 아니고 열 여섯 명이 함께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강의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엔 다들 한결 불안이 가신 표정이었다. 금방 끝날 여정이고,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긴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많은 동료가 생겼기 때문이다. 체육대회에서 줄다리기를 할 때 우리 편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작가님의 강의를 듣고 나니 왜 작가님이 반짝반짝 빛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멀리 있어 더 빛나는 별을 마음속에 가득 품은 사람이 띨 수 있는 눈빛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사람의 생생한 눈빛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고 그 마음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면서도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구나’라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처방전
조금만 생각하고
밥을 열심히 먹을 것
편지를 잘 읽어 볼 것
(슬로보트 지음, 김성라 그림, <고르고르 인생관>, 어떤우주,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