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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Dec 15. 2023

기분이 없는 날

나 같은 저혈압 인간들은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딘가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비 오는 날엔 대기 중에 양이온이 많아져서 어쩌고 하는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건 자세히 몰라도 어쨌든 수영장  왕복 다섯 판 때린 사람처럼 축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집에서 브런치를 열었다. 원래 오랜 친구와 강남역에서 약속이 있었지만 친구가 출근시간을 착각했던 바람에 약속이 취소되었고 그냥 잠옷 차림으로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9살 아이가 했던 조각조각의 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메모되어있었다. 이걸 한번 정리해봐야겠다. 그러려고 The Book Of You 매거진도 만들어놓은 거니까. (구독자 0명)


일단 제목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기분이 없다는 표현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9살 아이가 한 말이다. 나는 기분이 더럽다(표준어)거나 기분이 드럽다(비표준어)고 하지 기분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아이도 기분이 공허하다는 뜻으로 없다고 한 게 아니다. 어른들이 축 처져서 '기운이 없다'고 한 말을 '기분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기운'이란 낱말은 한국어 어휘력이 모자란 우리 아이가 담기에는 생경했을 테고 그걸 흔한 낱말인 '기분'과 비슷하다고 혼자 판단해 결국 '기분이 없다'고 출력된 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이 아이의 언어를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관심있게 연구하는 엄마니까 안다.


이렇게 '기분이 없다'고 메모해둔 휴대폰의 몇 바이트를 여기에 기록하고 삭제한다.


다음은 바로 어제 있었던 아이의 언어를 기록해두고 싶다.

어제 하루만 해도 내가 이 아이의 말에 대해 기록해둔 것이 3가지나 된다.


1) 돈 따위 때문이야?

무슨 대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아이가 '돈 때문이야?'라고 말했어야 하는 순간이었을 거다.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한 말이었는지 뭔지 아이가 자꾸만 '엄마! 저건 돈 따위 때문이야?'라고 반복해서 질문을 했었다. 뭐라고? 나는 바로 알아듣지 못해서 천천히 다시 말해보라고 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건지 드라마 대사에서 '돈 따위'가 자주 나와서 그랬는지 아이는 그냥 '돈 때문이야'라고 해도 될 것을 '돈 따위 때문이야?'라고 애써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과 '따위'를 한 문장에 반드시 붙여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건 내 탓(?)도 있다. 나는 항상 돈은 중요하지 않은 거라고 아이에게 말해왔다. 어른들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물론 살아보니 돈이 제일 중요한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등학생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외출했을 때 잃어버린 물건들에 대해서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 네가 안 다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물건은 잃어버리면 다시 사거나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이 몹시 다치거나 죽는 것은 '다시'라는 것이 없기에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래서 '돈'이 '따위'와 붙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3년 뒤엔 지금과 다른 말을 해야겠지만... 돈 아껴써라 돈이 최고다 따위..?)


2) 남부럽지 않은 대학

이것도 '돈 따위'와 비슷한 맥락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앞에 '남부럽지 않은'을 붙여서 말했다. 그게 대학의 공식전체표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건 아동도서인 <안녕 자두야>를 탓한다. 거기에서 처음 이 말을 접했기 때문이다.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가야지!'라는 표현을 읽은 뒤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고 그 다음엔 고등학교에 가고 그 다음엔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간다고 말했다. 어른들 앞에서 '저는 나중에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갈 거예요!'라고 말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는데 내가 마치 교육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땀을 흘렸지만(그렇게 보이기 싫다) 그건 아이가 그냥 대학을 '남부럽지 않은 대학'의 준말 정도로 알고 있어서 저렇게 말한다고 해명을 했다. 너 이제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가면 큰일나게 생겼는데...?


3) 끄덕없다? 끄떡있다?

아이가 이걸 구분하지 못한다는 걸 어제 알아서 좀 놀랐다. 아무런 변동이나 탈이 없이 매우 온전하다는 뜻의 형용사가 '끄떡없다'이고, 고개 따위를 아래위로 거볍게 움직이다라는 뜻의 동사가 '끄덕이다'이다. 근데 아이가 이걸 혼동해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끄떡없다'의 반대말을 '끄떡있다' 쯤으로 알고 자기 맘대로 활용해서 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구두야 아이구심이야

그래도 그게 아직은 귀여워서 창피를 주며 고쳐주려고는 안 했다. 아 이거 나중에 정리해서 적어둬야지 라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오늘은 날씨 탓에 기분이 없는 날이라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돈 따위 때문에 하는 일은 마감 전에 끝내서 더 쓸 것도 없고 이따 아이가 하교하면 자기가 간다고 주장하는 남부럽지 않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학원이나 데려다주고 저녁 8시 20분에 tvn에 영화 올빼미를 한다고 하니 고개나 끄덕이며 '역시 유해진! 진지한 역도 끄떡없네!' 감탄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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