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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지현 Oct 14. 2024

첫 직장을 퇴사한 이유

1부. 내가 시니어라구요?

‘나 사고쳤다.’ 


합격 문자를 받고 나니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나 제대로 사고 쳤다. 이제 어떻게 하지? 진짜 퇴사를 해야하나? 나는 왜 이직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 나는 왜 맨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케터 채용’을 검색했지?


아직도 그날 그 회의실에서 했던 이야기가 생생하다. 회사 점심시간이었다. 팀에서 친한 몇몇이 회의실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된 대화 주제는 회사원들 사는 것 다 똑같듯 회사에 대한 험담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그 수준이 다른 때와는 달랐다. 

  

"우리 회사는 지금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야."

"크크크 저희 지금 타이타닉 호에서 가라앉는 중인지도 모르고 다 같이 바이올린 키고 춤추고 있는건가요?"

"응 언젠가 정신차리면 물 속에서 잭! 잭! 외치고 있을거야."

"너무 슬픈데요 크크"

"나야 이제 나이도 들고, 적당히 편하게 다니다 그만두면 되는건데 너는 아직 젊잖아. 물론 나야 너랑 같이 일하는게 좋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성장하는 회사로 옮기는게 맞는 것 같아. 다른데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데 너까지 타이타닉 호에서 같이 가라앉는걸 보는건 안타까운 일이야."

"……."


오랜 기간 나를 지켜보셨던 차장님의 진심어린 이야기는 그 누가 하는 말보다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창 일하고, 타이타닉 호처럼 침몰하는 회사와 함께 가라앉을까봐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셨다. 


그 즈음 내가 다니던 회사는 경영 악화로 모든 비용을 절감하고 있었다. 회사가 어려워질 때 직격타를 맞는 부서 1위는? 바로 마케팅팀이다. 마케팅은 돈을 쓰는 부서다. 비용 절감은 곧 마케팅 축소를 뜻한다. 모든 돈 쓰는 활동에 제한이 갈 수밖에 없고, 돈을 쓸 수 없다면 마케팅 활동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차장님이 어린 후배들을 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상황이었다. 


그날 회의실에서의 대화 이후 ‘타이타닉 호’가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질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내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열심히 ‘마케터 채용’을 검색했던 것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덜컥 합격하고, 내 손에 선택지가 쥐어지니 겁이 났다. 내가 진짜 퇴사를 원했던 것일까? 8년 9개월을 다닌 회사였다. 회사를 넘어, 내 삶에서도 평생 볼 사이라는 것을 감히 자신할 수 있는 좋은 동료들도 있었다. 지금 이 회사에서 마케터로서의 나의 롤도 명확하였다. 이것은 8년간 내가 이 회사에서 쌓아온 나만의 자산이었다. 이 자산을 포기하고 이직하는 것이 정말 맞을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다니는 회사가 어려운지 아닌지, 마케터로서의 제약이 있는지 없는지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적당히 먹고 살 만큼만 벌면 됐고, 남들 일하는 수준만 일하면 됐다. 나는 작고 소중한 내 인생을 잘 일구며 행복하게 사는게 더 중요한 사람이다. 이게 나의 직장관이고 인생관이다. 그래서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큰 불평없이 8년을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내 삶이 만족스럽기 때문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제 더이상 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다. 그게 진짜 문제였다. 


30대 초, 슬럼프가 왔다. 인생의 가장 큰 적은 권태라는데, 이 답도 없는 감정이 나에게 온 것이다. 8년간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만 하며 변화없이 살아왔다. 큰 변화 없이 소소하게 살아온 내 인생이 제법 마음에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변화가 없으니 성장도 없었다. 30년 넘게 살았지만 몸뚱아리만 컸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어른아이였다. 뒤돌아서니 나에게 주어진 타이틀은 ‘부모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자, ’성실한 직장인’밖에 없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도 몰랐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기꺼이 선택할 용기도 없었다. 더이상 이런 내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쇠퇴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 인생의 정체가 진짜 문제였다.


그때 나에게 새로운 선택지로 나타난게 이직이었다. 충동적으로 이력서를 써서 덜컥 합격한 새로운 회사였다. 막상 합격을 하니 커리어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직을 하면 슬럼프를 극복하고,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 수 있을까?’


이직이 100점짜리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60점 정도는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한 환경을 바꾸면 인생의 정체기도 슬기롭게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이상한 믿음이 생겨났다. 8년간 똑같았던 내 일상에 변화를 주고, 다시 작고 소중한 내 인생을 일구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이직은 내 인생에 180도 다른 변화를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나는 결국 8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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