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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지현 Oct 14. 2024

8년차 이벤트쟁이입니다.

1부. 내가 시니어라구요?

어느 날과 다름없는 퇴근길이었다. 녹초가 된 상태로 지하철 의자에 앉아 아무 생각없이 인터넷 검색을 했다. 


- 커머스 온라인 마케터 채용


나와 딱 맞는 포지션을 찾는건 늘 어렵다. 어쩌다 내가 하는 업무와 잘 맞는 포지션을 찾더라도, 무언가 하나씩 아쉽다. 지금 내가 속한 회사보다 작은 규모이거나, 요구하는 연차 수준이 너무 낮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높은 팀장급을 뽑는다. 


‘나 같은 이벤트쟁이는 시장에서 수요가 별로 없나?…’


나는 스스로를 종종 ‘이벤트 쟁이’라고 칭한다. 멋지게 말하면 마케터지만 사실 각종 이벤트를 기획하고 실행하고 운영하는, 이벤트 생산 노동자다. 지금 바로 스마트폰을 켜서 아무 쇼핑 앱에 들어가보아라. 이벤트만 모아둔 카테고리 탭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쿠폰, 적립금, 사은품, 경품 등 각종 혜택을 이벤트로 잘 포장해서 고객에게 보여주고, 매출을 만든다. 이 일만 8년을 했다. 


쇼핑앱을 돌아다니면 이벤트가 없는 곳이 없는데, 왜 사람을 뽑는 회사는 별로 없을까? 내가 눈이 높은 것일까? 물론 눈이 높을 수는 있다. 8년동안 한 회사만 다니다가 이제서야 이직을 생각하는데, 아무 곳이나 갈 수는 없다.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회사에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물론 돈도 더 많이 받아야 했다. 이건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아무런 기대 없이 스크롤을 내리려는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하나 있었다. 


커머스 온라인 마케터 (8년 이상) 


‘커머스 온라인 마케터? 그것도 8년 이상이라고?' 

이것은 제목부터가 ‘지현아 우린 너를 뽑고 있어’ 라고 말하는 수준이었다. JD(Job Description, 해당 업무가 하는 일을 상세히 기술해 놓은 것) 역시 완벽했다. 내가 8년동안 주구장창 하던 일이 써 있었다. 어느 하나 찜찜한 구석이 없었다. ’나 이런 경험은 별로 없는데…’ 라고 생각할 포인트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공고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지? 


무엇보다도 ‘8년 이상’의 업무 경험을 요구하는 것이 놀라왔다.이건 그간의 채용 사이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요구 연차였다. 5~8년 미만도 아니고, 왜 하필 8년 이상으로 특정해서 뽑는 걸까? 이유가 궁금했지만 솔직히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팀장직으로 뽑는 것도 아닌데 뭔 상관인가? 누가 이 자리를 채 가기 전에 내가 빨리 차지해야겠단 생각 뿐이었다. 지금 내가 있는 회사에서 이곳으로 이직한다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엄청난 레벨업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할 틈이 없었다. 부리나케 서류를 제출했다. 


그리고 3주 후 연락이 왔다.


- 서류를 합격하셨습니다. 1차 면접 일정을 확인해주세요.


나에게 드디어 면접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서류 합격의 기쁨도 잠시, 막상 면접을 준비하려니 내 안의 불안과 걱정이 솟구쳤다. 8년 이상? 왜 하필 8년 이상이라고 쓴 걸까? 어느 정도의 역량을 요구하길래 8년 이상이라고 쓴거지? 난 그냥 연차먹은 하마일 뿐인데…? 내 업무 수준이 진짜 8년 이상이 맞을까? 보통의 8년차는 어느정도 업무 수준을 소화할까? 내 안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일반적인 회사에서의 8년차는 과장 직급을 달고 일하는 사람이다. 나도 지금 회사에서 과장이다. 대리 말 + 과장 초가 가장 부려먹기 좋은 연차라는 측면에서 ‘8년 이상’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뭘 시켜도 혼자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사람’ 정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내가 그간 일한 짬밥이 있는데 초반엔 부적응해도 나중엔 알아서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그 관점에서 8년 이상은 OK…


혹시 서비스의 방향성을 제시하길 바라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을 접었다. 방향성 제시를 원했다면 8년 이상이 아니라 ‘팀장’을 뽑았을 것이다. JD 어디에도 ‘업무 리딩’을 요구하는 부분은 없었다. 사실 이 공고가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8년차가 사실 낮은 연차가 아님에도, 리더급이 아닌 평사원으로 이직할 수 있다는 점은 굉장한 메리트였다. 이 시기를 놓치면 향후에 정말 부담스러운 포지션만 있을게 불보듯 뻔했다. 내 연차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평사원’ 타이틀로 이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물론 ‘8년 이상’이라고 써있으니 8년 이하 연차로 구성된 팀원들이 있고, 그 팀원들과 함께 파트를 맡을 리스크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도 지금 2명의 친구와 함께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정도는 내가 소화할 수 있겠다 싶었다. ‘8년 이상’ 공고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마치고, 면접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내가 이직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3년 전, 그러니까 내가 대리였을 때 이직을 한번 시도했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나는 워낙 말 주변이 없다보니 면접에 너무 약했다. 긴장이 너무 심했고, 면접에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하던 일도 잘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면접의 기억은 평생의 이불킥 감이다. 아직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이번에는 그런 이불킥 경험을 또 한 번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지금은 나도 이 회사에서 과장 직급으로 일을 하고 있다. 적어도 면접 때 내가 한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망신당할 일은 없어야 했다. 이건 면접의 합불 여부와는 상관이 없었다. 8년을 일한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여러모로 ‘8년’이라는 족쇄가 나를 붙들었다. 


그렇게 ‘8년차’의 자존심을 걸고 면접을 봤다. 나도 2~3년 사이 제법 여유가 생겼는지 생각보다 면접을 편안하게 잘 봤다. 나의 8년 경력에 스크래치가 갈 만큼의 처참한 면접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게 1차 면접을 합격했고, 2차 면접도 합격했다. 얼떨결에 처우 협의까지 끝내고 정신차려보니 갑자기 나에게 2개의 선택지가 생겼다. 

  

- 현재 회사에 남아있을 것인가?

- 다른 회사로 이직할 것인가? 


진짜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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