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내가 시니어라구요?
회사에 퇴사 소식을 오픈했다. 절대 나가지 않을 것 같던 애가 난데없이 퇴사 발표를 하다니, 다들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특히 오랜 기간 나를 이끌고 응원해주셨던 나의 사수가 제일 충격을 받으셨다. 회사가 방향성을 잃고 선배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괜찮은 후배들이 계속 나가는 것 같다며 본인을 자책하기도 하셨다. 감사하고 죄송했다. 좋은 선배들 덕분에 내가 이곳에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새로운 회사에서도 이런 선배들을 내가 만날 수 있을까? 항상 보고, 배우고, 따랐던 선배들 없이 나 혼자서 일해야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첫 출근이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의 마음이 더 커졌다.
퇴사 후 일주일이라는 아주 짧은 휴식 시간을 갖고, 새로운 회사로 출근했다. 이직한 회사는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가 제도로 정착된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출근 첫날 회사의 풍경은 비교적 한산하고 어딘가 쓸쓸하기까지 했다. 회사에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내가 이직한 팀의 팀원들도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소개하는 뻘쭘한 일도 피할 수 있었다.
재택근무하는 회사답게 팀장님과의 첫 면담도 화상 회의로 진행됐다. 나도 코로나가 유행했을 당시에는 잠깐 재택 근무를 하긴 했지만, 화상회의가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데 커뮤니케이션 방식까지 너무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은 나에게 언제나 긴장감을 준다.
"지현님 안녕하세요~ 오늘 출근했어요?"
"네. 오늘 출근했습니다!."
"출근해도 어차피 사람 없으니까, 내일부터는 그냥 집에서 재택해요."
면접 이후 처음 팀장님을 뵙는 자리였다. 대뜸 나의 출근여부를 물어보시더니, 내일부터는 재택하라며 쿨한 가이드를 내려주셨다. 재택근무 너무 감사하지만, 내일부터는 집에서 뭘 해야 하나 막막했다.
"막상 오긴 왔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막하네요. 하하
"앞으로 맘편히 쉴 시간 없을테니까 쉴 수 있을 때 푹 쉬는게 좋을거에요. 놀고 싶어도 이제 못놀아요. "
새로운 팀장님은 웃으며 무시 무시한 소리를 잘 하시는 분이었다.
"지현님은 시니어 마케터로서 신규 서비스 파트를 이끌어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시니어인가요?"
"지현님이 저희 팀에서 연차가 제일 높아요."
팀장님이 보여주신 팀 조직도 속에서 내 이름의 위치는 팀장님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 이름 석자 옆 괄호 안에 떡하니 3글자가 써 있었다. '시니어…'
뭔가 단단히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높은 수준의 업무 역량 요구는 당연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게 팀에서 최고참 시니어 역할일 줄은 몰랐다. 나 아직 30대 초반인데, 내가 팀에서 최고참 시니어라고요? 그것도 팀장 바로 아래에 있는…?
이전 회사에서 나는 조직의 허리였다. 아래로는 사원과 대리 친구들이 있었고 위로는 나보다 연차 높은 과차장님들이 있었다. 선배들에게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알려주며 일했다. 내가 판단이 안서고 모르겠는 것은 믿을만한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 후배들을 가르쳤다. 이게 내가 8년간 일해오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직한 회사에선 내가 최고참 시니어란다. 혼자 알아서 잘 해야 한다는 각오는 있었지만, 내가 최고 선배 역할까지 해야할 줄은 몰랐다. 이직하면서 내가 잘 따랐던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없단 사실이 슬펐지만, 그래도 새로운 인연을 다시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를 만들 가능성조차 없을 줄은 몰랐다. 내가 팀장 다음 연차라니… 전 회사에서 15년차 이상 차장님들이 할 법한 역할을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이건 내가 감당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제가 시니어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다 하게 되어있어요. 나도 팀장 하기 싫었어. 회사가 시키는데 어떡해. 해야지. "
그래. 맞는 말이다. 회사가 시키는데 어떡하나. 할 수밖에.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팀장님과의 첫 면담이 끝났다. 찜찜한 구석만 남았다. 이직한 회사에서 ‘8년차’의 무게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으로 밝혀졌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두려워진다. 내 생각보다, 꽤, 많이 힘들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