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Apr 11. 2023

온전한 순간


비가 계속 오던 여름휴가 기간. 마지막 날 밤 해가 지는 시간 비가 그쳤다.

숙소 뒷마당이라도 산책을 가보자 무작정 나갔다.

초록색이 물기를 가득 머금어 싱그럽기까지 한 여름밤.

노랗게 물들어 가는 하늘과 그곳에 덩그러니 있던 나무 의자.


숙소 체크인을 할 때 날씨가 좋으면 숙소 곳곳에 사진 찍을 수 있게

해놓은 곳이 있는데 참 아쉽다고 말씀해 주시던 직원분의 말이 생각났다.

아마 날이 좋았다면 저 의자에 앉아 사진도 찍었겠지.


마치 이곳만 동화 속으로 들어온 거 같다.

근심 걱정 없이 오늘은 참 행복한 하루였다 말하며

엔딩을 보여주는 듯한.

한낮에도 회색빛 구름이 가득해

어두컴컴했는데, 그 비구름들은 다 어디 가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주다니.


한참 미술을 배우던 학창 시절 한 가지 색으로

나뭇잎을 다 채우는 나를 보며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생각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자연은 단 하나도 같은 색이 없어.

빛과 바람에 따라 순간마다 색이 달라지거든.

오래 관찰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던 거 같다.

한 물체의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해 그렇게 색을 칠해버렸다.

이 오랜 습관을 바꾸기 위해 자연 속에 가만히

바라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1분 전 구름의 모양과 색이 아주 미세할지라도 1분 후 달라졌다.

아주 작은 바람에 나뭇가지의 잎들의 색이 빛에 따라 달라진다.

땅에 있는 작은 꽃들조차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다 다른 색을 보여준다.


그림을 처음 배울 때 빛과 그림자를 가르쳐 준다.

빛이 오는 방향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과 방향을 설정해야 자연스럽게 사물을 그릴 수 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전, 처음 빛이 오는 방향을 설정한다.

그림이 어색해 보일 때 선생님은 늘 물어보시는 질문이 있다.

'빛이 지금 어디서 오고 있니?'


빛이 오는 방향이 설정되면, 그림자의 방향도 정해진다.

그리고 빛의 세기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와 색이 정해진다.

자연을 보는 게 재밌는 게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날의 날씨에 따라

빛과 바람, 그리고 색이 달라진다.


내가 본 그날의 의자와 배경은

그 누구도 똑같이 다시 볼 수 없을 거다.


산책을 하며 만났던 나무들도, 꽃도, 늘 같은 색깔일 수 없는데.

나는 왜 늘 긍정적인 색이기만을 원했을지.

나는 늘 한결같이 단단한 사람이길 원했는지.

내가 알고 있는 내 색깔이 이 햇빛 아래에 같은 색을 나타내고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만큼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똑같은 색을 가질 수 없는 자연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들어가 나무 의자 옆에 서서

노을 지는 하늘만 바라봤었다.

낮 동안 내내 비가 와서 흥건히 젖은 나무 의자지만,

그냥 털썩 앉아 이 풍경 속에 녹아들어볼걸.

옷은 빨면 되겠지만 이 색깔들은 다시 볼 수 없을 텐데.



-

wisdomjjae@gmail.com

https://www.instagram.com/wise_studio_

작가의 이전글 빛나는 미완성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