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금세 피곤이 몰려와 일과를 마치고 초소로 돌아오면 순식간에 잠들었다. 잠귀가 밝은 편이 아닌데도 예전에는 새벽에 들어서는 배달 오토바이의 굉음이나 늦은 귀가를 서두르던 취객이 돌연 쏘아 대는 고성방가에 금방 깨서 나가보곤 했다. 하지만 점을 찍으면서부터 어지간한 소음에는 무뎌졌다. 주민이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겨우 눈을 뜰 때가 잦았다. 그때마다 주민의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났고 다음 조회 시간이면 어김없이 관리소장의 지적이 이어졌다. 확실히 무릎보호대를 빼고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부쩍 힘에 부쳤다. 절반쯤 마치고 나면 난간을 잡고 있어도 다리가 후들거렸고 온몸이 짓눌리는 듯했다. 죄를 떠올리며 비는 용서도 120개의 점을 찍어 벌 수 있는 돈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모든 현관문은 하나로 뭉쳐져 비슷비슷해 보였다. 12층 다음에 10층이나 9층이 나와도 눈치채지 못할 것처럼 어질하기도 했다.
새벽녘 앓는 소리를 삼키며 돌아눕는 사이 간이침대가 삐거덕댔다. 순간 등 쪽에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자세를 바꿔가며 손으로 뒤적이다 보니 물렁물렁한 게 잡혔다. 무릎보호대였다. 약국에서 파는 전문 의료용은 아니었고 근처 생활용품점에서 싼값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번 쓰지 않아도 한쪽이 늘어났고 귀퉁이가 찢겨 나가 나달나달했다. 이왕이면 제대로 된 걸 사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지난 조회 이후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계단 내려오게 했다고 시위하시는 겁니까?”
조회가 시작되자마자 관리소장은 턱짓으로 내 무릎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릎보호대를 찬 자리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경비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누군가 까치발까지 하며 노려봤다. 마스크 뒤에 숨겨진 표정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B조 우석 씨도 그러시더니 둘이 짰습니까? 복장 불량입니다. 복장! 분명히 말씀드렸죠? 더워도 모자는 꼭 쓰시고 슬리퍼는 초소 안에서만 신으시라고.”
기본이 안 돼 있어, 기본이. 마지막 목소리는 작았지만 유난히 도드라져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시선이 하나둘 떨어져 나갈 때까지도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힘을 주려고 할수록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점을 찍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 다른 작업이 밀렸고 휴식 시간도 절반쯤 날아갔다. 처음 점을 찍기로 한 날, 관리소장은 직접 30세대 한 라인을 계단으로 돌고 나오더니 120세대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다. 거기에 선심 쓰듯 오 분을 더 얹어 주면서 올라갈 땐 엘리베이터를 타도 좋다고 했다. 이어서 주민들이 계단으로 올라갈 때 한 번, 내려오면서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는 걸 겨우 조정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도둑은 계단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끝에 가선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제시간에 끝내 달라고 닦달했다. 그럼 작업에도 휴식에도 아무 지장 없을 테니. 관리소장의 표현에 따르면 합리적인 데다가 인간적이기까지 한 마감 시간이었다. 관리소장이 멀어졌을 때 누군가 한숨 끝에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합리적이긴. 지는 우리보다 한참 젊으면서.
처음에야 관리소장과 비슷한 빠르기로 마칠 수 있었지만 다음 라인부터 무릎이 쑤셔 어기적거렸다. 나중에는 누군가 무릎을 틀어잡고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나마 무릎보호대라도 있으면 나았는데 이제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계단이 갑자기 줄어들진 않을 텐데. 나중에야 경비가 무릎보호대까지 하며 일하는 게 보기 불편하다는 민원이 접수됐다고 들었다. 경비들은 이참에 업무 내용이 축소되거나 경비를 추가로 채용할 줄 알았지만 관리소장이 생각한 해결책은 사뭇 달랐다.
“올라갈 때 엘리베이터 타는 것까지 봐 드렸는데 이러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여긴 여러분들 편의 봐 드리는 곳이 아닙니다. 앞으로 확실히 관리 감독할 겁니다. 힘들면 안 하셔도 됩니다. 괜히 나중에 남 탓하지 마시고.”
빈틈없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날부터 무릎보호대를 어딘가에 처박아 둔 채 내내 잊고 있었다. 그동안 몰래 써오던 다른 경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관리소장과 주민들이 보는 데서 대놓고 무릎보호대를 차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 요령껏 좀 하지. 둘 때문에 이제 무릎보호대도 못 쓰고 이게 뭐요?”
조회가 끝나고 몰려 나가는 사이 뒤통수에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늦지 않게 돌아봤지만 마스크에 가려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꼼짝없이 무릎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고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올 수밖에.
무릎보호대 정도는 관리소장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