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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점점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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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석순 Oct 20. 2024

점점 (5)

  사뿐대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소년과 소년의 엄마가 주고받는 대화가 들려왔다. 말랑말랑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비명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아니야, 일하시는 거야.”     


   “저런 일도 있어?”     


   소년의 엄마는 쓰읍, 하는 입소리를 내며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소년은 여전히 수상한 사람을 보듯 고개를 기울이고 미간을 찌푸렸다. 몸을 빗겨 계단을 내려가자 소년은 자리까지 옮겨 가며 끝까지 쳐다봤다. 6층에 도착한 나는 괜히 더 공들여 점을 찍었다.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처럼.         

      

   점을 찍은 일은 고단하면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종교의식처럼 생각하고 점 하나마다 지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떠올리다 보니 제법 많았다. 나중엔 죄가 아닌 게 별로 없었다. 120개를 못 채울 것도 없었다. 순찰할 때 각 세대 현관문마다 죄에 대한 고백과 뒤늦은 반성이 놓인 셈이었다. 운동으로 여기며 횟수를 세거나 월급을 시간으로 쪼개 분 단위로 계산하기도 했다. 그러면 점 하나 찍는데 얼마를 버는지 알 수 있었다. 찍을 때마다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덜 힘든 것도 같았다. 그러다 이제는 다른 그림 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걸음을 서두르다가도 멈춰 서 현관문을 쭉 훑었다. 문고리는 멀쩡한지. 혹시 누군가 뜯어내려고 했던 흔적이 있진 않은지. 시선은 어제보다 더 번진 듯한 얼룩에 닿았다. 다 같은 현관문처럼 보여도 눈여겨보면 다른 부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으그러지거나 녹슨 자리도 제각각이었고 문고리에 종을 매달아 놓은 집도 있었다. 발자국이 찍힌 문도 있었고 한쪽에만 칠이 벗겨진 문도 있었다. 지난주에 없던 김칫국물 얼룩이 묻어 있기도 했다. 얼룩 모양은 매번 다르게 보였다. 작은 토끼처럼 보이다가도 어느새 번져 나가 손바닥만 해질 때도 있었다. 주민에게 자국을 일러 주면 대부분 성가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우유도 자주 확인했다. 늘 비어 있는 우유 주머니를 확인할 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다 우유가 남아 있으면 그날은 어쩐지 작업에도 생기가 돌았다. 사연을 떠올리다 보면 서너 층은 금방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럼 예전에 본 게 김칫국물이 아니라 핏자국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닿았다.     


   이따금 붙어 있는 접착 메모지도 효과적이었다. ‘초인종 금지’나 ‘전단지 좀 붙이지 마세요’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버티면 다야?’ 같은 내용에서는 따분하게 이어지던 걸음이 돌연 활달해졌다. 며칠 후 ‘작작 좀 해. 할 만큼 했어.’가 새로 붙어 있었다. 서로 다른 글씨체의 두 메모 사이를 짐작하다 보면 어느새 1층에 다다랐다.      


   우석 씨는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방식 공유할수록 작업은 더 빠르고 체계적으로 이뤄졌지만 도리어 그 때문에 꺼리는 경비도 많았다. 저 혼자 유리한 업무평가를 받아 내고는 딱히 요령이랄 게 없었다고 잡아떼면 그뿐이었다.      


   우석 씨도 그런 부류일까.      


   우석 씨에게 점을 찍겠다고 떼쓰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도 묻고 싶었다. 혹시 나처럼 불필요한 오해에 휩싸이진 않았는지. 그럴 때 화가 나는 쪽인지 아니면 서글퍼지거나 자책하는지. 메모를 보고선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는지도 알고 싶었다. 한편으론 고단한 걸음 사이 가끔 내가 찍은 점을 보며 기운을 냈는지도 궁금했다. 사실 진짜 물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B조가 정말 모두 동의했는지. 혹시 B조 조회 시간에도 관리소장이 참고로 A조는 다 동의했다고 하진 않았는지.      


   우석 씨와 조금만 가까워져 이야기를 나눠 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듯했다. 하지만 교대할 때 우석 씨는 여전히 겨우 인사만 전하고 말 꺼내기가 무섭게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아무리 금지라고 해도 같은 초소를 쓰다 보면 눈치껏 사담을 나눌 수 있었는데 그럴 생각은 아예 없어 보였다. 가족이나 고향을 물어도 못 들은 척하거나 “비슷하죠, 뭐. 저라고 특출난 데가 있나요?” 하는 식으로 어물쩍 넘겼다. 예전에 했던 일을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누군가 합법적인 일은 아니었냐고 짓궂게 물으며 키득거려도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만큼 종잡을 수 없었다. 어떨 때 보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두고 훌쩍 떠날 사람처럼 보였다. 우석 씨가 떠난 초소를 봐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근무일지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자기가 채운 쓰레기통까지 말끔히 비우고 사라졌다. 초소에 물건도 남겨 두지 않았다. 우석 씨는 수건 한 장, 컵 하나 놓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비누나 치약 정도는 같이 두고 써도 좋으련만.      


   교대하고 나오면서 주민에게 그러하듯 억지로라도 우석 씨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 했지만 관뒀다. 적어도 아파트 단지 밖에서만큼은 일하기 싫은 마음 탓이었다. 초소를 나서기 전 휘둘러 보며 더는 다른 그림 찾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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