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석 씨가 찍었을 점 아래 새로운 점을 찍었다. 어제 같은 시각 나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착실하게 점을 찍어 나갔을 우석 씨를 떠올리자 조금 기운이 났다. 이 점이 주민들의 불안을 얼마나 잠재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점을 다 찍고 돌아가면 오늘도 아홉 시를 훌쩍 넘길 것 같았다.
주민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걸음을 옮길 때 706호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우리 집에 막 낙서해.”
앙칼진 목소리에 성큼 돌아봤다. 순간 소년의 엄마는 소년을 홱 잡아끌었다. 소년은 비틀거리면서도 시선을 내 쪽으로 고정했다. 지난주에 5층쯤 어쩌면 6층쯤에서 마주친 아이도 비슷한 표정을 내보였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뭐 하는 거냐고 물어왔다. 목소리에는 자기만 빼놓고 재미를 보고 있냐는 듯한 투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동안 아이에게는 상자를 쌓아 올리는 건 블록 쌓기로, 손전등으로 단지를 훑으며 나아가는 순찰은 모험으로 보이는 듯했다. 작년에 제초 작업을 할 때는 만화영화라도 보듯 환호성까지 지르며 쳐다봤다. 그때 주변을 휘둘러 봤지만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경비가 책임을 물게 될 것이 빤해 작업 내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자세를 낮추고 문마다 점을 찍는 놀이라고 둘러대다가 멈칫했다. 언젠가 재활용쓰레기장을 정리할 때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이는 심심했던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농담 삼아 지금 저쪽 경비아저씨랑 누가 더 빨리 끝내는지 내기 중이라 바쁘다고 했다. 얼마 뒤 경비들이 업무 시간에 한가하게 내기나 한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어쩌면 내 대답에 따라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 경비 아저씨가 재미있게 놀고 있다고 전할지도 몰랐다.
아이는 심드렁한 얼굴로 내 주변을 맴돌았다.
“점을 왜 찍어요?”
관리소장은 주민들이 묻는 말에는 재깍 대답하라고 했다. 고민 끝에 악당들로부터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대답한 순간 아이가 사인펜을 빼앗아 까르르 웃었다. 관리소장이 초소에 두고 점을 찍을 때만 아껴 쓰라며 나눠 준 사인펜이었다. 사인펜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어 대개 없어져도 찾지 않았고 따로 사두지 않아도 집안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왔다. 판촉물로도 자주 나왔고 그만큼 빌려주고 나서도 쉽게 잊었다. 그래서 뚜껑을 닫아 두지 않아 잉크가 마르거나 부러지면 미련 없이 버렸다.
“지구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니고 겨우 아파트를 지켜요?”
아이의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메웠다. 아이는 손 쓸 틈도 없이 다음 날짜에 점을 찍더니 맞은편 세대에도 여러 개의 점을 찍어 댔다. 그러더니 자기 얼굴에도 점을 여러 개 찍었다. 잡아채려 손을 뻗으면 내 얼굴에도 점을 찍을 기세로 덤볐다. 내가 다가서자 아이는 가까스로 몸을 웅크리고는 잽싸게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이조차도 놀이라고 생각하는 듯 아이는 명랑한 환성을 연거푸 내질렀다. 아슬아슬하게 놓칠수록 목소리는 한껏 달아올랐다. 아이를 안아서 들면 됐지만 그럴 순 없었다. 관리소장이 정한 규칙 중 하나는 주민들 몸에 손대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아이에게. 불필요한 마찰을 방지하고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아이가 방심하고 두리번거리는 사이 겨우 사인펜을 빼앗았다. 그새 잉크가 샜는지 손에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순간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금방 울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부턴가 양쪽 현관문이 열리고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한쪽에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고 맞은편 노파는 혀를 찼다.
다음날 경비가 아이 얼굴에 점을 찍은 것도 모자라 업무까지 떠넘겼다는 얘기가 돌았다. 다행히 아이가 계속해서 또 점을 찍어 보겠다고 떼쓰는 바람에 오해로 마무리되었다. 현관문 옆에 붙은 안전 점검표를 아이들 손에 닿지 않도록 높이 다는 정도의 조치로 충분했다. 하지만 경비가 미리 두세 개씩 점을 찍어 놓고 꼼수를 부린다는 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