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조회 시간에 관리소장은 예상 밖의 답변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순찰을 강화한다고만 얼버무리다가 그저 점을 찍기만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매일 두 번씩 순찰할 때 각 세대 현관문마다 붙여 놓은 안전 점검표에 점을 찍는 것이었다. 경비들 사이에서 눈짓이 오가더니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점을 찍는다는 건 현관문에 이상이 없다는 확인이었고 그만큼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일과 시간에는 틈이 없었으니 얼마 되지 않는 휴식 시간을 쪼갤 수밖에 없었다. 소란은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불려 나갔다. 마뜩잖아 보이는 관리소장은 입술을 깨물더니 곧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도 뭔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중요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끝나지 않은 와중에 환경정화 문제까지 불거지자 라텍스 장갑을 끼고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할 때도 비슷한 얘기를 전했다. 뒤에서 누군가 씹어뱉듯 툴툴거렸다. 남처럼 굴다가 이럴 때만 우리지. 관리소장은 뒤틀린 표정을 감추지 않고 불만인 사람은 나가라고 외쳤다. 관리소장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월급이 빠지는 순간 생활에 어떤 방식으로 균열이 생기는지. 채용 전후 진행된 면담 기록을 통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실업급여라도 타려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는 것까지도. 단체로 일을 놓으면 관리소장은 한동안 곤란해지겠지만 이내 더 곤란해지는 건 경비들일 것이었다. 이 도시 아파트 단지 소장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수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관리소장은 일할 사람은 널렸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와 교대하던 민기 씨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쯤 쓰레기봉투를 현관밖에 내놓던 주민과의 말다툼 끝에 그만뒀다. 민기 씨 자리는 고작 이틀 만에 채워졌다.
우석 씨가 새로 왔을 때 나는 일이 잘 풀려 민기 씨가 돌아온 줄 알았다. 경비복을 입으면 죄다 고만고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석 씨 뒤로 민기 씨가 들어섰다. 모자를 벗으니 영 딴판이라 못 알아볼 뻔했다. 처음부터 모자를 벗은 채 만났다면 절대 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짐을 챙기던 민기 씨는 언젠가 이 아파트 주민으로 들어와 관리소장을 맘껏 무시할 거라고 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었다.
밖으로 나서던 관리소장은 미리 준비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참고로 B조는 전부 동의했습니다.”
교대하던 B조 우석 씨의 눈짓과 한쪽으로 기울어진 눈썹이 떠올랐다. 마스크를 쓴 우석 씨의 얼굴은 CCTV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석 씨는 좀처럼 마스크를 내리는 일이 없었다. 관리소장은 정부의 방역 지침이 느슨해졌을 때도 마스크를 꼭 쓰라고 당부했다. 특히 주민들이 볼 때 마스크를 내리면 약점으로 잡힐 거라고 윽박질렀다. 그래도 다들 쓰레기장 뒤쪽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숨을 고를 땐 슬쩍 내렸다가 올려 썼다. 하지만 우석 씨만은 철저히 규정을 준수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모범적인 자세라고 추켜세우기도 했고 한쪽에서는 고지식하다고 뇌까렸다. 그때 나는 어느 쪽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석 씨와는 주민이 짐을 맡겼다거나 다음 주에 이사 나가는 세대가 있다는 특이 사항 외에는 말도 거의 주고받지 않았다. 관리소장이 새로 오면서 업무와 관련된 내용 외에 잡담이 금지되긴 했다. 어차피 잡담이라고 해봐야 대개 사사로운 신세는 뒤로 감춘 채 비가 올 것 같다거나 근처에 맛이 형편없는 분식점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하필 그 분식점이 주민의 친척 언니가 운영하던 것이었다. 말이 새어 나가 부풀려지면서 경비들이 일은 안 하고 주민들 뒷얘기로 시시덕거린다는 식으로 퍼져 나갔다. 그 시간만 줄여도 민원과 사고가 줄어들 거라고도.
어제는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난다는 건의 사항 말곤 전할 말도 마땅찮아 우석 씨와 그저 목인사만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석 씨의 눈가와 미간마저 흐릿해지다가 불현듯 민기 씨와 겹쳤다. 그래서 가끔 민기 씨라고 잘못 불렀지만 우석 씨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것처럼.
B조 중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면 결국 점을 찍으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군소리 없이 고작 관리소장을 향해 눈이나 한번 흘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