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 가는 길,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 남원시 이백면 여원재 옛길에 있는 '유정과차(劉綎過此) 각석. '1593년 왜군을 정벌하러 온 명나라장수 유정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내용이다. 이듬해인 1594년 유정이 두 번째 지나가며 남겼다는 ‘유정부과(劉綎復過)’ 바위글씨도 바로 위에 있다. 남원시에서는 2017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복원하며 설명문을 세워놓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이후, 1593년 3월부터 시작된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협상은 결국 1596년 9월 결렬되고, 왜군은 1597년 1월에 재침을 하게 된다. 즉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임금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왜군을 맞아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나, 장군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출진(出陣)하지 않는다. 그 후 조선 조정은 이러한 명령불복종 등을 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고, 2월 26일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하여 한양 의금부로 압송한다.(옛 날짜는 모두 음력 표기)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형이 임박할 즈음, 원로대신 판중추부사 정탁의 ‘신구차(伸救箚:목숨을 건 상소)’ 등에 힘입어 가까스로 사형을 면한 이순신 장군은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의 ‘백의종군’을 명받게 된다.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는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이 남행하여, 6월 7일 권율 도원수의 군진이 있던 합천(초계)에 이르는 노정(路程)을 말한다.
또 백의종군 중이던 7월 중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칠천량해전 직후인 7월 18일, 이순신 장군은 패전 후의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남해안을 둘러본 후, 진주 수곡 손경례의 집에 머무는데,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는 교지를 받는다. 따라서 이때의 노정을 백의종군로에 추가하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의 동선(動線)은 서울 종각(의금부)-남대문-수원-아산-논산-여산-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순천-구례-하동-단성-삼가-합천으로 이어진다. 전 구간을 답사 완료한 (사)한국체육진흥회의 자료에 의하면 약 676km에 이르는 거리다. 그리고 필자가 기획한 ‘지리산권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는 전북 남원시에서 운봉읍을 거쳐 전남 구례군, 경남 하동군과 산청군 단성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남원시 덕과면 월평정류소에서 산청군 단성면 단성교까지 약 190Km : 순천 이동거리 제외)
삼도수군통제사로 남해 바다를 지켜낸 이순신 장군이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지리산 자락을 백의종군하며 지나갔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지리산 자락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의종군 전, 한양으로 함거 압송되던 길은 통영별로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청과 함양을 거쳐 운봉~남원으로 이동하여 한양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또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후, 하동을 거쳐 구례에서 곡성으로 이동하는 조선 수군 재건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곳도 지리산 자락이다. 이렇듯 정유재란의 숨 막히는 전개와 이순신 장군의 이동 흔적, 그리고 지리산 자락의 길이 맞물리며 조선은 절망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유정부과 각석
“4월24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남원에 이르렀는데, 고을에서 15리 쯤 되는 곳에서 정철(丁哲) 등을 만났다. 남원부 5리 안까지 이르러서 내가 가는 것을 송별하였고, 나는 곧장 10리 밖의 동쪽(東面) 이희경(李喜慶)의 종 집으로 갔다. 애통한 심정을 어찌하리오.”[난중일기]
의금부에 투옥된 후 28일 만인 1597년(정유년) 4월 1일 출옥한 이순신 장군은 이틀을 한양에 머문 후,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기 위해 경남 합천(초계)으로 향한다. 이 머나먼 백의종군로 노정에서 출발 24일 만에 지리산 자락 남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장군이 남원부 읍내로 들어선 곳은 남원성 북문, 지금은 폐역이 된 옛남원역 바로 그 자리이다. 장군이 이곳을 지나간 후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남원성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는데(8월 16일), 당시 성을 지키던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한 조선군과 백성들 대부분은 이곳 북문에서 순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란이 끝난 후, 성이 함락되며 목숨을 잃은 만여 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합장한 묘가 ‘만인의총’인데, 오랫동안 이곳 북문 터 인근에 있다가 1964년 지금의 위치로(향교동) 옮겨졌다.
위의 일기에서 남원부 앞 15리쯤에서 만났다고 하는 정철은 여수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제 및 조카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또 장군이 의금부에 투옥된 후에는 구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며 남원부에 도착하였을 즈음은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 확보와 백성들의 위무를 위하여 전라도로 내려온 호조판서 김수가 분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각종 기록에 나타난다. 아마 이때 고을 전체가 팽팽한 긴장감에 싸여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일행들과의 대화나 당시 남원부의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있다. 장군이 남원부에 들어서서 하룻밤을 머문 동쪽 10리 밖은 지금의 남원시 월락동 즈음으로 추정된다.
이틑날 이순신 장군은 남원부를 출발하여 운봉으로 가기 위해 여원재 옛길로 들어선다. 현재 복원된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는 이백면사무소에서 이백초등학교 앞을 지나 목가리 마을회관 앞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지금은 한적한 시골마을이지만, 여원재로 이어지던 통영별로가 지나가던 곳으로 양조장과 주막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라고 한다. 목가리에서 양가저수지에 이르면 이제 여원재 옛길로 길이 이어진다.(약 3km) 산자락으로 난 아름다운 길이지만 일부 사유지 구간을 우회하는 곳은 작은 계곡을 건너야하니 주의를 요한다.
양가저수지에서 약 40분 정도(2km) 진행하면 임진왜란 때에 구원병으로 참전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지나갔다는 내용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 즉 유정과차(劉綎過此/1593년 5월), 유정부과(劉綎復過/1594년 3월) 각석을 차례로 만난다. 바로 임진왜란 강화협상기에 명나라군 주 병력 철군 후, 잔류 병력과 조선군을 총지휘하던 유정이 경상도 팔거와 전라도 남원을 오고갔다는 사실을 바위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긴 유적이라 하겠다.
이순신과 유정은 그 후 1598년 정유재란 막바지에 순천왜교성 전투의 수륙양공 책임을 맡아 출전하게 되는 인연이 있다. 이렇듯 여원재 옛길에는 임진왜란사를 관통하는 역사인물들의 흔적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길을 걷던 이순신 장군은 바위에 새겨진 유정의 이름을 보았을까?
모쪼록 우리 역사 기억저장소 '여원재 옛길'이 새롭게 깨어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회고하며 걷게 되길 기대해 본다.
[201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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