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엄사 사사자삼충석탑, 석텁에 서린 효성과 사랑
▲화엄사 효대. 사사자삼층석탑(중앙)과 석등(왼쪽)이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에는 배례석 2기가 있다. 석탑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견성전이다.
지난 9월 말, 화엄사 사사자(四獅子)삼층석탑(국보35호)이 7년여에 걸친 보수복원공사 끝에 일반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6년 전 들렀을 때 보호펜스 안에 해체된 석탑부재가 널브러져 있었고, 2017년 연말까지 복원공사가 끝날 것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던 적이 있었는데, 무려 4년이나 더 걸려 불사가 완료된 것이다.
화엄사 홈페이지에는 각황전 뒤 언덕에 네 마리의 사자가 탑을 받치고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을 효대로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석탑 맞은편 석등이 함께 공간을 이루는 언덕 전체를 효대로 일컬음이 옳은 듯하다. 이 효대라는 이름은 약 900여 년 전, 고려시대의 고승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에 머물면서 지었다는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가 많고,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없어라. 온종일 서성이며 지나간 일 생각하니, 저물녘 효대에 슬픈 바람이 일어나네.’라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짓다’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위 시에서 적멸당은 현재 견성전(적멸보궁)이고, 길상봉은 키 큰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는 하나 동북쪽으로 바라보였을 지리산 노고단이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효대에서의 풍경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1487년 늦가을(음력 10월6일)에 지리산 유람을 하며 화엄사에 들렀던 추강 남효온과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인 1686년(음력 8월 21일)에 들렀던 우담 정시한의 기록에 의해 이 석탑과 석등 스토리가 오랫동안 전승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당 뒤에는 탑전이 있다.)...뜰의 한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 있고, 네 기둥 가운데 서서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부인상이 있었다.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부인상은 비구니가 된 연기(緣起)의 어머니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석탑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네 귀퉁이에 탑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 있었으며, 그 기둥 사이에 서서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남자상이 있었는데 부인상을 향해 우러러보고 있었다. 남자상이 바로 연기이다. 연기는 옛 신라 사람으로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 절을 세웠다.”(남효온 「지리산일과」/최석기 외 역)
“또 부도암으로 올라가서 세워진 부도를 보니 그 모습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기묘하다. 이 절은 연기(煙起)조사가 창건하여 석가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조사의 석상이 탑 앞에 앉은 형태로 있고, 여인상은 탑 밑 바로 중앙에서 탑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승려가 하는 말이 여인은 곧 일명 선각조사의 어머니 상이라고 한다.”(정시한 『산중일기』/신대현 역)
당대의 지식인이 쓴 이 두 글 속의 풍경은 ‘비구니가 되어 석탑에 서있는 어머니에게 석등에 있는 연기조사가 차(茶)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설명되며, 이렇듯 어머니에 대한 스님의 지극한 효성을 기려 효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기록에서 효대 인근에 있었던 전각이 오래전부터 적멸당, 탑전, 부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사자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있는 승려상
▲사사자삼층석탑 맞은 편에 있는 석등 안의 승려상
그런데 최근 들어 ‘544년(진흥왕5) 인도승려 연기(煙氣)조사가 창건한 신라사찰’이라는 화엄사의 창건역사가 큰 혼란에 빠져있다. 당시 구례지역이 백제 영토라는 문제로 제기된 의견이 그렇고, 연기조사는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제작을 발원한 연기법사(緣起法師)와 동일 인물로, 화엄사의 창건연대는 통일신라기인 754년(경덕왕13)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이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석탑 복원을 알리는 어느 언론매체에서는 효대의 풍경을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로도 볼 수 있다는 엉거주춤한 내용으로 보도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이라는 구실로 픽션이 사실처럼 콘텐츠화되는 오늘날, 이처럼 오랫동안 역사인물들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효대 이야기가 흔들리고 있어 안타깝다.
▲효대 가는 길. 108계단
어둠 보다 조금 앞선 시각, 각황전 왼쪽 적멸보궁 안내판이 서있는 108계단에 들어섰다.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며 오르자, 해지기 직전의 서늘하고 맑은 기운이 서린 효대에 닿았다. 석탑과 석등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동안 서성거리자 오래전 마주했던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스님의 사랑과 효심, 그 어머니가 느꼈을 가슴 벅찬 행복이...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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