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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Jun 01. 2023

택배와 함께 한 달살이를 보내주며

치앙마이 마지막 이야기

현지인들 일상에 끼어들었다 돌아 나올 뿐이지 않을까, 조금 긴 여행일 뿐이지 않을까, 별 것 아닐 거라 여겼던 한 달 살이는 결론적으로 별 거였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 몸에 익은 치앙마이는 한국에 돌아온 후 식당에서 물을 주문할 뻔했을 때, 왼쪽 운전대가 어색할 때, 깨끗한 화장실이 감동적일 때, 걷다 벌레를 밟을까 긴장할 때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1~2주 정도의 여행으론 겪지 못했던 증상이니 그곳에서 머문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던 사실인 셈.


그러 한 달 살이가 별 거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비단 이 소소한 후유증들 때문만이 아니다.



그 후의 치앙마이
예민하던 시누안이 건강히 새끼를 낳았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니우네가 가게를 처분하고 터전을 옮겼다는 것. 자리 잡을 때까지 딸 닉과 시누안도 남의 집에 맡겼다고 한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후, 니우는 남편과 통화할 때면 가게를 정리해야 할지 종종 고민을 토로했었다. 팽과 팽의 부모님, 즉 장인, 장모님 모두가 장사를 접고 일자리를 구해 한 동네에서 살기를 원하지만 본인은 가게를 계속 운영하고 싶다고. 돌이켜보니 니우와 팽이 싸운 듯 분위기가 냉랭했던 날들이 간혹 있었는데 아마도 터전 옮기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맞서는 중이었던 것 같다.


사원에서 시켜주는 공부로 지금의 영어실력을 갖추고, 혼자 힘으로 가게를 꾸렸던 명석한 니우이니 너는 어디서든 적응해 낼 거라 막연하게 응원할 뿐이었다.





돌아온 지 두 달도 안 되었는데 매일 앉아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함께한 친구들그 자리에 더 이상 없다. 막연히 내년, 내후년 언제든 치앙마이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곳 사람들이니 그 자리에서 기다려줄 거라 내심 단정했다. 그래서 매일  니우네서 놀려고 하는 남편에게 '과하다며' 타박하거나 교외로 나들이 가자는 제안도 다음을 기약했었는데. 아쉽고 미안하다.


공장 엔지니어로 취직하면서 노랗던 머리를 검고 짧게 다듬은 니우를 보고 나서야, 단골 커피집도, 좋아하던 시장 수끼도, 친절하게 웃어주던 숙소 아저씨도, 매일 보이던 고양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이 없단 걸 실감한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그 순간 그곳에서 만나 부대낄 수 있었던, 돌아오지 않을 2월그래서 새삼 더 소중하다.


가게를 지키고 싶어 했을 니우마음을 멀리서나마 위로했다. 그 와중에 새 동네 '치앙다오'를 구경시켜 준다며 다음에 올 때는 아예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는 걸 보니 정 많기 한결같다.



그때 그 한 달은 한 번 뿐이라


그곳 사람들 일상에 끼어들었다 다시 돌아 나왔다. 조금 긴 여행을 한 것도 맞다. 그러나 별 게 아닌 건 아니었다. 직접 발 붙이고 인연을 맺은 한 달의 순간들은 말 그대로 유일무이해서 나조차 다시 간다 해도 똑같이 만들어낼 수가 없다. 열흘 살기든 백일 살기든 일단 시작한 이상 나만의 한정판이며, 특별하다.


니우네한테 선물을 보내려 하니 떨어져 살고 있는 딸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따라 '그린' 태국어

짜장범벅 킬러 닉을 위한 맞춤형 택배는 배송료만 5만 원이 나와 배꼽이 더 크다. 그래도 아빠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언제 짜장면이 도착하냐고 묻는다고 하니 보람이 . 언젠가, 어딘가에서 또 시간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택배도, 한 달의 추억도 손에서 놓아주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저절로 '내 남은 평생에 둥근달을 몇 번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감사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달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이 다음 날에는 날이 흐리고 궂어서 보름달이 뜰지 말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달뿐 아니라 모든 기회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일기일회입니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입니다.  

-법정스님의 일기일회 中-





* 늦은 인사드립니다. 한 달의 경험 몇 개월에 걸쳐 담으며 충분한 시간을 가졌음에도, 발행하고 보면 담지 못한 것이 생각나거나 담았더라도 너무 지엽적, 개인적 내용이진 않은가 고민을 넘어선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잦았습니다.^_ㅠ 그럼에도 읽어주시고, 한 마디를 남겨주시거나 구독을 해주신 한 분 한 분 덕분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특유의 여유에 반해 한 달 살러 다녀온 치앙마이와 우연히 친구가 된 맥주가게 니우네는 무작정 무언가 써보고 싶던 저에게 한동안 글감이 샘솟게 해 줬을뿐더러 이렇게 읽어주신 모든 분과의 인연도 만들어주었습니다. 타지에서의 경험으로 절실히 느낀 '일기일회', 모든 순간과 인연이 생애 단 한 번임을 명심하면서 앞으로도 (크든, 작든!) 인상적인 순간들을 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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