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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Jun 19. 2023

택시 경적이 세 번 울리면

어쩌다 태국 정치 근황

뉴스보다 보니 치앙마이에서 만났던 그랩 기사님이 떠오른다. 홀린 듯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이제야 그날의 모든 것이 이해된다(인터넷 만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80501




어느 하루 올드시티 타패문에서 그랩을 잡아 탔다. 타패문은 광장을 끼고 있어 항상 비둘기 천지에 유동인구가 많고, 각종 단체활동을 하는 모습들도 심심찮게 보이는 곳이다. 혼잡하던 통에 안락한 차 안으로 피신하고 나서 안도감을 느끼던 중, 갑자기 기사님이 경적을 울리셨다.


"빵. 빵. 빵-"


연속 3번이었는데, 상황상 그럴 이유가 없어 의아했다. 이후 다시 세 번, 또 세 번.. 어리둥절하던 순간 창밖으로 스쳐가는 한 여성분이 보였다. 검지부터 약지까지 3개의 손가락을 꼿꼿하게 세운 채 뭐라 쓰여있는 피켓을 목에 걸고 있었다.

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세 손가락 경례' (ⓒ연합뉴스), 영화 헝거게임에서 따왔다고 한다.


'손가락 3개.. 빵빵 3번.. '


연관돼있는 게 분명했지만 무슨 의미일까. 우리끼리 속닥대는 것을 느끼셨는지 기사님이 입을 떼셨다.


"우리 왕은 정말 부패했어."


그렇다. 방금 목격한 것은 반정부 시위였고 기사님은 이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경적을 울린 듯했다.




태국은 왕이 통치하는 나라다. 20여 년 전 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분명 왕실에 대한 국민정서가 우호적이라고 설명 들은 기억이 있다. 또한 이번에 들른 고산지대 카렌족 마을을 포함해 양귀비(마약) 산지이던 태국 북부 지역에 커피 재배를 전파하고 수십 년에 걸친 갱생 프로젝트를 펼친 장본인이 바로 '왕'이라 가이드가 말해주지 않았나 . 6개월 넘게 전국시찰하고 빈민들과 면담하며 정책을 만들었다던 애민정신의 끝판왕 라마 9세의 치적은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었고, 그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상징물은 카메라, 연필, 지도라고 다.


그런데 이 격양된 분위기는 뭘까. 한 달씩 와있으면서도 먹고 노는 데만 집중하느라 어쩌면 이 사회의 단면만을 보고 있었던 걸까..?


"(라마) 9세까진 괜찮았어. 10세가 문제야.."


기사님은 서툰 영어로도 가는 내내 말을 쉬지 않으셨다. 특히 관광대국으로서 주수입이 끊길 수밖에 없던 코시국 내내 정부로부터 받은 보조금이 돼지고기 몇 근 사면 없어질 금액이었다며 분개하셨는데, 남편과 나는 당시엔 과장 섞인 말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보조금 관련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으나 잠깐의 검색만으로도 현 왕 라마 10세가 기이한 행보를 보이는데 도가 튼 인물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 잘 날 없는 사생활


오래 기다린 끝에 왕위에 올라서일까. 라마 10세는 26세 연하 스튜어디스 출신 왕비와 4번째 결혼을 했음에도 무려 20여 명의 후궁을 들이며 폭주를 시작했는데 이중 군 조종사 출신 시니낫을 총애해 '왕의 배우자'라는 지위를 부여했고, 본처 왕비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시니낫에게 성유를 발라주는 왕. ⓒBBC 영상 캡처출처 : 허프포스트코리아

얼마 되지 않아 시니낫의 누드사진 1000여 장이 '누군가에 의해' 공개되었고 왕실은 즉각 "시니낫이 조신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국왕에게 불충실했다"라고 발표하며 지위를 박탈하고 손절해버린다. 다만, 시니낫을 필두로 한 후궁파가 왕비파에 역공이라도 한 것인지, 얼마간의 궁중암투 끝에 '왕의 배우자' 지위는 다시 시니낫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조종사 출신 시니낫이 왕의 배우자까지 오른 데는 라마 10세의 비행기 사랑이 한몫했다고 한다. 태국 왕실은 제트기 등 비행기 38대를 소유하고 있으며 21년 기준 항공기 구입비를 제외하고 연료비, 유지 보수비 등에만 1년에 20억 밧(약 722억 원) 정도의 예산을 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 왕실의 한 해 예산 약 90억 밧(우리 돈 약 3250억 원) 20% 가량을 비행기에 쏟아붓고 있는 것인데, 일단 왕실 예산 규모 부터천문학적이다. '세금 먹는 하마'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는 네덜란드 왕실 예산의 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이니 말 다하지 않았을까.(출처 :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21061841981)


개가 무슨 죄겠냐마는.. (ⓒ구글 이미지)

또한 왕은 엄청난 애견가라 2015년 자신의 애완견 ‘푸푸’가 죽자 공군대장 직위를 부여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여는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2017년에는 배꼽티를 입고 의문의 여성과 독일에서 쇼핑하는 영상이 유포되면서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구글 이미지)


바람 잘 날 더 없는 본업생활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왕이 400억 달러(약 46조)에 달하는 왕실 재산을 송두리째 사유화하면서부터이다. 원래 정부에 위탁해 두어 사용할 때마다 CPB(태국왕실자산국) 이사회의 결의 등을 거쳐야 한다는 조항의 감시를 받아왔는데, 아예 이 모든 자산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시암은행, 시암시멘트, 석유화학 기업 PTT 등 태국의 굵직한 대기업 지분의 상당 부분과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 또한 더 마음대로,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군부와 손 잡고 이 모든 것을 권력구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한편으론 유흥비로 흥청망청 소비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뒷전이라는 점.


https://m.kmib.co.kr/view.asp?arcid=0014452390


이윽고 코로나가 창궐하자 후궁 20여 명과 애완견 30마리, 수행원 200여 명을 데리고 독일 호화 별장으로 피난을 가버린 행태는 '군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 마저 저버린 상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자국보다 독일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고 하니 국민들의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태국에도 봄이 올까?


태국 형법에 따르면 왕과 왕비 등 왕실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하면 왕실모독죄로 최대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태국을 어엿한 중진국 반열에 올려둔 어진 선왕을 향한 애정과 존경심이 있었기에 그간 자연스레 받아들여져 왔을 터였다. 그러나 아들 라마 10세가 보인 행보는 아버지 프리미엄과 왕실모독죄에도 불구, 국민들이 극에 달한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마침내 이 조항의 폐지를 요구하고 나서게 다.


진보 정당중 하나인 '퓨처포워드당'이 왕실모독죄 처벌조항 폐지 물결에 동참하자 왕실은 헌법재판소를 통해 정당을 해체시켜 버렸다.


해산당한 의원들과 당원들은 굴하지 않고 별 존재감 없던 행동전진당(Move Forward Party, MFP)으로 모여 힘을 합쳤고, 지난 5월 총선에서 152석을 얻어 제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우리로 치면 소수 진보정당이 갑분 제1당이 된 것이니 상상하기 어려운 돌풍이다.

MFP 대표이자 총리 후보 피타 림짜른랏(42) (ⓒKBS뉴스)

그러나 아직 바람의 방향은 모호하다. 대통령급인 태국 총리 선출에는 하원 의원 500명 외에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원 250명도 참여한다. 총 750표 중 과반인 376석 이상을 확보하는 쪽이 총리가 되는 것이다. MFP의 의석은 152석으로 제2야당의 표를 합쳐도 300표가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상원 250표는 기본으로 안고 시작하는 군부의 위치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MFP가 앞으로도 세력을 열심히 모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0607089200076?input=1179m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태국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버렸다고 한다. 나 또한 처음엔 재미로 찾아보다가, 나중엔 혼자 보기 아까워 태국 근황을 정리 하다 보니 이틀이 우습게 가버렸다. 세계 증시부터 한국의 방구석 휴직자하루에까지, 라마 10세의 영향력은 이토록 전방위적이다.. 허나 그 무엇보다 자국민들의 삶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절대적 입헌군주제 사회에서 민주화 실현이 가능할지, 신임 잃은 왕실의 빈틈을 군부가 가만 보고만 있을지, 부패 타도 정신으로 뭉치기 시작한 태국 국민들은 어느 선까지 전진한 후 타협할 지, 궁금하면서도 행운을 빌게 된다. 문화와 제도가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자 잠시 관찰해 본 것이 전부인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계-속 (당시로선) 이해할 수 없던 이야기를 하셔서 차마 내릴 수 없던, 난감하던 그날의 택시 안이 이제 이해가 된다. 기사님은 지난 5월에 희망을 얻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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