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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May 18. 2023

치앙마이 한 달어치

한 달간 가장 익숙해진 말은 "Sabai Sabai [사바이 사바이]"였다. Relaxed, be comfortable (편안한, 좋은) 등의 뜻인여유롭고 느긋한 치앙마이 사람들의 단골멘트였다.



재촉 않는 캐디, 약속시간 다 돼서야 눈 비비며 문 연 현지 친구, 20분 넘게 헤매면서도 배차 취소 하지 않는 그랩 기사, 체크아웃 시간을 넘겨 미안하다 하니 "너네 내일 나가는 줄 알았어."라는 숙소관리인.. 심지어 동물들까지 여유롭고 겁이 없었다.


벙커 속 상전
조강지처를 몰아낸 길냥이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인 카톡방이 늘어갔지만 어느 날부터 개의치 않았다. 구독 중인 유튜버들의 영상과 소식도 뚝 끊었다. 나는 맨날 이런저런 뉴스에 의견을 남기던 '댓글부대원(남편표현)'인데 포털에 접속조차 안 하는 날이 늘어갔다. 무뎌진 대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되돌아보곤 했다.


치앙마이 사람들 영향이었다. 모두 대책 없어 보일 정도의 여유를 보였지만 하루하루 생업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종속되거나 절어있지 않았고 세상과 사람을 유연히 받아들일 여유공간 정도를 항상 남겨두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편한 티 없이 몇 번이고 설명하고, 그러다 친해지고, 넉넉하지 않아도 베풀어줬다.




이것저것 사오려고 비워서 가져갔던 캐리어에 치앙마이 한 달어치가 실렸다.


니우가 벽에 걸어두고 가보로 여기던 축구유니폼을 남편에게 건네줬을 때, 너도 갖고 싶지 않냐 입던 셔츠를 팽이 내주었을 때(뒷면에 가게 번호 적혀있는 게 함정), 남폰이 회사에서 받은 LEO 백팩주며 "리미티드 에디숀.."이라 덧붙였을 .

여유는 상황이 갖춰졌을 때 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닌 만족과 감사를 토대로 자란다는 것, 그렇게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자세라는 걸 알려준 사람들, 이 사람들과 함께 추억이 전부라, 담아 온 치앙마이 한 달어치는 유통기한이 없다.

떠나던 날, 남폰이 준 백팩에 이것저것 몰아넣은 덕에 간신히 위탁수하물 무게를 맞출 수 있었다. 구세주 가방!




우리 부부에게 남은 기억들은 서류 두 장에 걸쳐 찍는 간인처럼 맞대었을 때 완전해진다.


"할머니네 국수 그립다."는 말에 손짓발짓으로 주문하던 단골집을 떠올린. "그 집 커피 먹고싶다"는 말엔 사온 원두가 아직 남았다며 위로하고, "굿 샷" 대신 "깽짱러이-" 라 외치는 남편을 보며 웃는. 야시장에서 봤던 돼지만한 쥐를 회상하며 아직도 함께 몸서리치고, 개에 만  넘는 망고 앞에서 일등석이라도 타고 온 거냐쑥덕거린다.


소소하다 못해 사소한 교감들이지만 모든 순간들이 두고두고 곱씹을 추억이었음을, 일생의 선물이었음을 일깨운다. 한때나마 서로 잘 보지 못하고 살던 일상을 떠올려보면, 어느새 쌓인 공통분모들이 그렇게 값지고 감사할 수가 없다.

차가 태국어를 읽지 못한다.ㅋㅋ

남편은 요즘 치앙마이에 지내는 동안 좋아하게 된 태국 가요를 틀어놓고 운전한다.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면 "그랩에 타신 걸 환영"한다며 능청 떤다. 밤에는 니우와 "I miss you" 라며 간지러운 영상통화를 하고, TV에 치앙마이가 나올 때면 이런저런 알은체를 보탠다. 치앙앓이 중인 그를 보다 못해 말했다.



"오빠. 치앙마이 대학으로 이직해~"



".. 안 돼.. 랭킹 높아...."

싫다는 소리는 안 한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치앙마이가 어딘지 조차 모르우리가, 우리의 대화가 달라졌다. 여유, 인연, 추억 한 달어치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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