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해하라
Comprehensible Input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듣기와 읽기를 통한 정보와 지식을 얻는 과정인 입력(input)은 반드시 필요하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3년 정도 거의 매일 CNN 영어 뉴스를 들었고, 영자신문을 읽었다. 그 당시 어휘 강사가 판매한 웹스터 영영사전을 요즘의 랩탑 마냥 늘 들고 다녔다. 전공 외에 영어공부를 할 방법이 없었기에 신문과 뉴스와 사전은 나의 영어 정보 입력의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영어를 많이 듣고 많이 읽었으니, 영어 귀가 뚫렸고 영어 독해력(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완벽해졌을까? 영어 학습법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어떤 한 가지 방법으로 영어를 마스터했다고 한다. 나도 그런 영웅담을 말하고 싶지만, 나에게 그런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마스터할 대상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나의 영어 입력 수단인 신문과 뉴스는 내 수준에 맞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해 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이 아니었다. 신문과 뉴스는 늘 전쟁과 내전, 그리고 무기 이야기뿐이었다. 내 수준보다 어려운 데다 관심사나 생활과 동떨어진 내용이니, 딴 일을 하면서 내용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영어와의 연애에 서툴렀던 것이다. 그래도 그리 힘들어하지 않은 이유는 영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CNN 외에 BBC, CNBC 또는 ABC뉴스를 즐겨 듣는다. 코리아 헤럴드 신문을 2년째 구독하고 있다. 지금은 관심 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다. 알지 못하는 단어나 표현이 나오면 사전을 찾거나 문맥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 이젠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즐길 수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스티븐 크라센(Stephen Krashen)이 1970-80년대 주장한 제2 언어 학습과 관련한 가설과 이론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이론은 ‘언어는 자연스러운 의사소통(natural communication)과 의미가 있는 상호작용(meaningful interaction)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한 배경은 그전까지는 언어를 자극과 반응과 같은 행동주의 적인 관점에서 보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연습(drill)을 통해 언어를 가르친 결과, 실제 상황에서 적절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결과가 생겼다. 그래서 모국어와 같이 자연스러운 습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국에 이민 온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을 연구하였기에, 우리나라 같은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서 이 가설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의 연구 대상자인 이민자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미국에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배웠지만, 우리는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상황이고, 일상에서 쉽게 말하고 듣기를 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 무의식적인 학습이던, 의식적인 학습이던 자신의 수준을 잘 알아야 한다. 크라센의 이론은 이해 가능한 입력을 제공해야 의미 있고 자연스러운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소리를 듣거나 글을 읽는 사람의 수준에+1 정도(1이란 조금 더 어려운 수준)가 되어야 자연스러운 습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인데, 문제는, 이 1의 수준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학습자의 수준에 비해 한 레벨 올린 정도가 이해 가능한 수준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 수준은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수준을 알고 글과 듣기의 수준을 정할 수 있을까? 만약, 자녀를 위해 책을 선정해주길 원한다면 <Five Finger Rule>을 사용해 보라. 학회에서 만난 미국 공립학교 사서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이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책을 펴서 모르는 단어가 없거나 1개 정도면 너무 쉬운 수준이고, 2, 3개 정도면 읽어 볼 만하다. 4개 이상이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5개가 된다면 너무 어려운 수준이니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성인이라면, 한 페이지를 읽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맥락을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는 정도라면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것이다. 이왕이면 나의 관심과 흥미가 있는 분야의 내용을 선택하라.
학생이 영어를 배우러 오면, 수준을 알기 위해 먼저 5분 정도의 레벨 테스트(진단 평가)를 한다. 시험지를 이용한 테스트가 아니다. 학생의 나이에 맞는 글을 읽어 보게 하고, 내용과 관련된 질문을 한두 마디 하면 실력을 바로 알 수 있다. ‘일, 읽어라’ 첫 번째 계명인 소리 내어 따라 읽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영어를 잘하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 영어 읽기의 훈련이 되어 있어야 말도 하고 쓰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연애 십계명의 ‘일, 읽어라’가 중요한 이유이다. 대학원에서 만난 영, 미 교수님 두 분이 내게 똑같이 “왜 한국인은 토익 시험을 보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어 실력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하니, “영어 실력은 말을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외국인이 우리말을 한두 마디 말하거나 글을 읽는 것을 보면 바로 그 사람의 한국어 실력을 알 수 있는 것과 똑같다.
영어와의 연애 레시피 둘째 비법: 이해 가능한 input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