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일상 <기항지 편 ep. 6>
당시 항차는 알래스카 노선의 출발점이었던 캐나다 밴쿠버에서 출발했다. 배는 미국 대륙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고, 우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기항했다. 더 내려와서 남미와 중미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었던 멕시코 카보 산 루카스, 과테말라 푸에르토 케찰, 그리고 코스타리카 푼타레나스에 기항했다.
그다음은 태평양에서 벗어날 순서였다. 카리브해로 들어가 멕시코만을 지나 대서양으로 들어가서 최종 목적지인 북유럽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곳을 지나야 한다.
파나마 운하 (Panama Canal)
사실 당시만 해도 파나마 운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감사하게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뭐라도 알고 난 다음에 구경하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사전 학습을 했다.
파나마 운하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인공 해양 지름길이다.
이 지름길이 없었을 때 선박들은 남미의 아래쪽으로 멀리 돌아서 항해해야 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를 사용함으로써,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는 선박은 약 15,000km,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가는 선박은 약 6,500km, 유럽과 호주와 동남아시아를 건너는 선박은 약 3,700km를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간과 비용 절약이 전 세계 해운업에 끼친 그 영향을 생각하면, 인류가 이토록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파나마 운하는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물의 부력과 갑문의 조절로 배를 이동시키는 초대형 수중 엘리베이터이다.
파나마 지협을 굴착해서 운하를 건설하는데 어려웠던 점 중 하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의 해수면 차이였다고 한다. 태평양이 대서양보다 약간 높기 때문에 운하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해발 최대 26m를 위아래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동은 태평양 쪽에 있는 미라프로레스의 챔버 2개와 페드로 미구엘의 챔버 1개, 그리고 대서양 쪽에 있는 가툰의 챔버 3개, 합해서 총 12개의 수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다. 각 챔버는 수 천 리터의 물을 홀드 할 수 있고, 10분 이내에 그 물을 비우고 채우면서 2분 이내로 수문을 열리고 닫히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1. 선박이 수문의 하부 챔버에 진입한다.
2. 첫 번째 챔버의 밸브가 열리고, 물은 중력에 따라 높은 챔버에서 가장 낮은 챔버로 흘러 수위를 해수면까지 높인다.
3. 잠긴 문이 열리면, 선박은 다음 챔버로 들어가게 되고 문이 닫힌다.
4. 다음 챔버에서도 동일하게 밸브를 열고, 수위를 첫 번째 챔버의 수위와 맞춘다.
5. 다음 문이 열리고 선박은 다음 챔버로 들어간다.
6.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여 수위가 다시 동일해지고, 선박은 드디어 수문 시스템에서 나와서 운하로 진입한다.
7. 운하를 지나서 반대쪽 끝의 수문 시스템에 도달하면, 동일한 과정을 통해 선박은 태평양 또는 대서양으로 나가게 된다.
이러한 작은 개울가 물도 아닌 넓고 넓은 바닷물을 이용하겠다는 그 발상을 생각하면, 인류가 이토록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파나마 운하는 언제 누가 만든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많은 사건사고들이 따랐던 운하 건설은 16세기에 스페인이 시작한 후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미국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운하 건설의 첫 시작은 지역조사였다. 1513년 스페인 국왕이 파나마 지협을 이용한 대양 횡단의 가능성을 보고 조사를 명령한 것이다. 초기 탐험가로 이름을 알린 발보아는 걸어서 파나마를 횡단하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파나마와 스페인, 미국에 그의 이름을 딴 기념물, 공원, 장소 등이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파나마의 화폐를 발보아라고 칭하기까지, 그의 업적이 의미하는 것이 꽤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534년에는 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시간이 흘러 1668년에는 잉글랜드가, 1689년에는 스코틀랜드가 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1881년에는 프랑스가 시도했다.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만하게 뛰어들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말라리아 전염병과 황열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약 2만 2천여 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손실만 남긴 채 공사를 중단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런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면서 그 당시에는 “그곳에 가는 백인은 멍청이며, 그곳에 머무는 백인은 더 멍청이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라고 한다.
이후 신흥 제국주의로 부상한 미국이 기회를 포착했다. 1902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프랑스의 운하 사업권을 매입하면서 파나마 운하 건설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03년에는 무력을 개입하여 콜롬비아의 한 주에 불과했던 파나마 주를 하나의 국가로서 독립시켰다. 이어 1904년에는 공식적으로 파나마 운하 건설의 주권을 휘어잡았다. 미국은 건설을 통제함에 있어서 이전 유럽 국가들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열대 모기 퇴치제와 같은 의약품 개발과 노동환경 개선과 같은 공중보건위생 개념 도입에도 힘썼다. 현재 통화 가치로 환산했을 때 2019년 우리나라 국가예산 약 470조억 원보다도 많은 금액을 투자하여 공사를 마무리했고, 1914년에는 운하를 개통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1977년부터 1999년까지는 파나마와 공공으로 운영했고, 이후 파나마가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됐다.
이러한 국가 간의 약 500년에 걸친 다툼과 경쟁을 생각하면, 파나마 운하의 이점이 주는 국가에의 이익에 다시 한번 놀라울 따름이다.
어느 정도 사전 학습을 마치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인류의 대단한 인내와 투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파나마 운하를 직접 경험하는 그날이 왔다.
나는 운하를 통과하는 그 과정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쉬는 시간에 밥을 굶는 것도 모자라서 업무 중에 각종 핑계를 대면서 오픈덱으로 달려가 열심히 구경했었다. 오픈덱에 올라갈 때마다 앞뒤로 선박들이 보였는데,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는 없으나 얼마나 바쁘게 운하가 운행되고 있는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날 나는 역사적이고도 신비로운 파나마 운하를 경험하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해상에서 다시 한번, 그리고 육상에서도 꼭 경험해보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