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21~122일 차>
121일 차 - 7월 14일
전 세계의 해운업과 해양사,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 운하.
1869년에 완공되기까지
수많은 건설 시도를 거치며
1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운하.
1956년에 이집트가 국유화하기까지
소유권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운하.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193km,
세계 최대의 운하.
수개월간 아프리카 대륙을 돌지 않아도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 수 있는 최단 항로.
Suez Canal
수에즈 운하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역사적인 장소를 지나간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었다.
세계지도에서 크게 확대했을 때
겨우 가느다란 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운하가
나를 그렇게 흥분시켰더랬다.
수에즈 운하에 얼마나 근접해가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내비게이션 채널부터 켰다.
거의 다 와가고 있었다.
오후 5시경
퀸 엘리자베스는 수에즈 운하의 입구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배들도 있었고,
우리 뒤에 도착한 배들도 있었다.
모두 이집트의 통과 허가와
파일럿의 수로 안내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다음날 새벽 5시경에 진입할 예정이다.
입구 주변에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사막이
나를 흥분케 했다.
하룻밤만 자면 수에즈 운하를 지난다!!
122일 차 - 7월 15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발코니로 나갔다.
일찍 일어난다고 일어났는데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좋다.
아침해가 뜨고 있는 수에즈 운하를 보다니
전날에 이어 흥분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내비게이션 채널에서는
그나마 선 조차로도 보이지 않는 수에즈 운하.
이게 뭐라고 나는 그저 최고조 흥분 상태였다.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것 중에
이집트 사막과 피라미드는 항상 빠지지 않는다.
사막을 직접 밟고 피라미드에 가지는 못하지만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크루즈에서
수영하는 것도 아무나 못하는 일 아닌가.
그것도 오픈덱 수영장에서 나 혼자서만 말이다.
홍해에 이어 수에즈 운하에서
나는 크루즈와 수영장을 통째로 전세 낸 마냥
또 여유 있게 수영을 즐겼다.
방으로 돌아와 출근 준비를 하는데
평소 같으면 초스피드로 끝날 출근 준비가
이날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젖은 머리를 말리다 말고
눈썹을 그리다 말고
자꾸만 발코니로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저 모래 언덕과 모래 들판일 뿐인 사막이
나에게는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어떤 다른 모양의 모래 언덕도 놓치고 싶지 않은
흥분되는 사막이었다.
몇 번씩 나가서 쳐다보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 옆방에 있는 매니저 친구가
돌고래가 있다며 소리를 질렀다.
알래스카 바다에서 호주 바다에서
남들 다 봤는데 이상하게도 나만 못 본
그 돌고래라고!?!?
나는 소리 지르면서
정말 자연스럽게 비디오 버튼을 눌렀다.
뭐 하나라도 더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남기겠다는
강한 의지 ㅋㅋ
사실 돌고래가 이 좁은 수로에 왜 있을까 싶었다.
분명 길을 잃고 들어왔는데 어디로 갈지 몰라서
아직도 우왕좌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돌고래가 길을 잃은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바다에서 헤엄치는 돌고래를 만났다.
사막도 보고 돌고래도 보고
나는 행복한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오전 사막과 업무를 마치고
점심 식사까지 끝났으니 이제 오후 사막이다.
대빵 보스 닐이 오늘 일 안 하냐며
그냥 사막인데 뭐가 좋냐고 놀렸다.
그냥 좋아!! 난 처음이란 말이야!
나중에 사진이랑 동영상 달라고 하기만 해!
그리고 일은 있다가 운하에서 나가면 할 거야~
사진 찍어야 하니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나나
그러라며 웃어 보내는 보스나 ㅋㅋ
그렇게 나는 나의 할 일(?)을 계속했다.
덱 11 선미에 있는 크루 오픈덱에 올라갔다.
우리 뒤를 쫓아오는 흐릿하게 보이는 컨테이너선과
바로 밑에는 파일럿이 보였다.
더 가까이에서 봐볼까 하고
덱 3의 오픈덱으로 내려갔다.
덱 3의 오픈덱을 한 바퀴 돌고는
덱 5 선수의 크루 오픈덱으로 이동했다.
운하 도중에 브이자로 갈라지는 구간이 있는데
마침 그곳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이번에는 덱 11 중앙의
스위트룸 승객 전용 오픈덱으로 올라갔다.
두 갈래로 나눠진 수로를 따라가다 보니
건너편에는 컨테이너선이 보였다.
우리와는 반대로
지중해에서 홍해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중간에는 저게 사막의 오아시스인가 싶은
물구덩이들이 몇 보였다.
물론 저것이 오아시스 일리는 없지만
수로 근처에 생긴 단순한 물구덩이일 수도 있지만
무슨 용도인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구덩이였다.
색깔 없는 모래 언덕만 보이다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도 많고 나무도 많았다.
사막의 끝에 운하의 끝에 마을을 만든 건가.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일까.
이 마을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지나가는 배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기차가 소리 내며 지나갔다.
우리 배를 기준으로
Port Side(좌현)에는 마을이
Starboard Side(우현)에는 사막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가 나에게는
페페로니 피자 위의 노란 중국집 단무지 같은
심하게 이상하지는 않은 것 같으면서도
일반적인 조합은 아니라 뭔가 이상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이 다리의 이름은
Mubarak Peace Bridge, 무바라크 평화의 다리로
Al Salam Bridge, 알 살람 다리,
또는 이집트와 일본의 우애의 다리
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El Qantara, 엘 칸타라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을 지닌 이 마을에서
수에즈 운하를 건널 수 있게 하는 다리이다.
대한민국의 한강대교가 훨씬 더 멋있지만
무슨 다리가 되었든
크루즈가 다리 밑을 지나갈 때에는
왜 이리도 흥분되는지 모른다.
다리도 지나고 한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운하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 뜨고부터
아니, 수에즈 운하를 지난다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
나를 흥분시켰던 수에즈 운하가
이것으로 끝인 것이다.
떠나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일까.
셀 수 없이 많은 새들이
운하의 끝자락에서 우리를 배웅하는듯했다.
수에즈 운하야,
잘 있어라, 또 올게.
이집트야,
다음번에는 내가 땅을 밟아 줄 테니 기다리거라.
딱 작년 이맘때쯤에는 파나마 운하를 지났었다.
그때의 흥분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에는 크루즈가 정상 운영되고 일을 때였고
일을 하느라 보고 싶은 만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흥미롭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다시 가고 싶은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
같은 앵글에서 찍은 사진을 몇 모아봤다.
같은 운하라 불리지만
달라도 너무 다른 운하.
세상에는 신비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