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23~124일 차>
123일 - 7월 16일
따스한 햇빛의 온화한 기후,
어떤 카메라로 찍어도 아름다운 자연,
세련되면서 낭만까지 있는 거리,
지갑을 탈탈 털어 비우고 싶은 센스 넘치는 쇼핑,
환상 여행, 보석 여행이라고도 불리는
Mediterranean Cruise
퀸 엘리자베스는 지금 지중해 크루즈 중이다.
유럽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아시아의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아프리카의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등
그 어디에도 못 가는
그 근처에도 못 가는
말 그대로 지중해를,
아니 지중해만 크루징하는 중이다.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땅 대신 물이다!!
이번에는 지중해에서
또 한 번 크루즈와 수영장을 통째로 전세 낸 마냥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고자 수영장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날은
전날로 컨트랙을 마치고 베케이션을 맞이한
우리 팀 매니저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태닝을 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프라이빗 수영장은 아니었지만
나름 지중해의 여유를 만끽했다.
지중해든 홍해든 카리브해든 대한민국 동해든
사실 배에서 보면 모두 똑같은 바다일 뿐이다.
조금 더 맑은 파랑이거나 진한 파랑이거나
좀 다른 파란색일 뿐, 모두 똑같은 바다다.
세상만사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 아니던가!
바다 위에 지중해라고 간판을 단건 아니지만
나는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지중해 크루즈 중인 거다!
그래서 난 이날도 행복한 마음으로
네 달도 넘은 격리생활의 모든 순간을 즐겼다.
오후에 갑자기 대빵 보스 닐의 호출이 있었다.
사우샘프턴에 다 와가니까 할 일이 더 생겼나,
나름 예상하며 닐 오피스로 갔다.
“I am so sorry, I have a news for you.
You are also going home on 25th.”
이렇게 갑자기 저를 보내시는 건가요....
8월 20일까지 아니었던가요....
한 명 남은 나까지 보내고
배는 이 세상에서 정말 소멸하고자 함인가요....
순간적으로 회사에서 잘리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
사실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보스는 본사에서 또 실수를 한 줄 알고
바로 연락을 해보았다고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현재의 최소 인원 153명에서 더 줄여서
100명 이하로 맞추려 한다는 것이었다.
선내 인원 조정에 관해서
보스의 의견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맞지만
그래서 모두 집에 가고 나만 남게 된 건 맞지만
이번에는 선사 차원에서
더 많은 인건비 절약을 위해 인원을 줄이는 것이라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심지아 본사 안에서도
530명을 무기한 휴직으로 돌린 상태이다.
보스가 설명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왔다.
나는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며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것도 다 네 덕이니
오히려 고맙다고 설명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지금 배에서 내리면
언제 다시 탈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언제까지 백수로 있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나보다 먼저 내린 크루들,
재승선을 위해 기다리다 아예 타지 못한 크루들,
그들은 이미 백수 아닌 백수 생활을 한지가
벌써 네 달째이다.
이번 하선으로 나를 포함해 61명이
백수 생활에 더 합류하게 된다.
도대체 몇 십만 명이 놀고 있단 말인가.
코로나 쇼크....
일주일 뒤에 갑자기 내린다고 하니 마음이 바빠졌다.
집에 가기 전에 마무리하고 내리려고 했던 것들을
일주일 안에 다해야 한다.
하지만 61명의 하선하는 크루,
28명의 승선하는 크루들의 준비가 먼저다.
124일 - 7월 17일
8월 20일 이후에 내릴 예정이었다.
한 달 동안 여유롭게 하려던 일들을
일주일 안에 다 해야 한다.
와인 마시면서 수다 떨고 놀고 싶은데
브런치랑 블로그 기록은 놓치기 싫고
사진도 더 찍어놓고 싶고
버릴 건 버리면서 짐도 싸야 하고
오피스 정리 및 청소도 해야 하고
공유 폴더의 백여 개 문서 파일도 정리해야 하고
내가 오프닝 준비 멤버로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인수인계는 문서로 남겨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사실 그 누구도 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그 누구도 뭐라고 안 하겠지만
한 달 동안 내가 해놓고 떠나고 싶었던 일들이
이제는 일주일 안에 다 해야 하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이날의 할 일을 하고
저녁에는 운동을 하러 짐으로 향했다.
석양과 바다의 아름다운 조합을 바라보며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
광활한 바다 위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항구를 바라보며
깨끗하고 쾌적한 짐에서 하는 운동,
당분간 안녕이구나.
이제 이 아름다운 석양도
네 달 넘는 격리기간 동안 질리도록 흔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름다운 이 석양,
당분간 안녕이구나.
괜히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지기까지 했다.
이런 복잡한 마음도 진심이지만,
승선 후 288일, 격리 후 124일의 피로를 생각하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이
펄쩍 뛰어 날아다니고 싶을 만큼 좋은 것도 진심이다.
드디어 배를 벗어나 육지를 밟는다.
발을 딛는 순간 휘청거리는 건 아닐까?
비행기를 타러 공항을 간다.
공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되는 건 아닐까?
런던 히스로 우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면세점도 열었다고 한다.
번쩍이는 면세점 조명만 봐도 흥분할 것 같다.
공항 안에는 카페와 레스토랑도 있다.
배 음식이 아닌 것을 먹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워진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흥분된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게 된다.
비행기 안에서는 거리두기 실천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건 맞겠지?
인천 공항의 입국장을 통해 드디어 입국이다.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눈물 난다.
14일 격리까지 마치고 진짜 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