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블블랙 May 27. 2021

퇴근했지만 퇴근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도 눈이 자연스레 뜨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나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목욕을 깨끗하게 마쳤다. 그렇게 출근 준비를 했다.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옷을 편하디편하게 입었고, 현관을 나서지 않은 것뿐이다.


재택근무도 이제 익숙해질 때가 됐다. 회사에서는 재택 근무자의 편의와 보안에 있어서 최선의 인프라를 제공했다. 나 또한 회사에서의 업무 환경과 최대한 같게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윈도우 레지스트리를 직접 손대본 게 얼마 만인지. 거의 스무 해 남짓 되는 듯싶다. 집에는 캡슐 커피와 얼음도 넉넉하다. 흡연장까지의 거리도 회사에서보다 훨씬 가깝다. 더는 근무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재택 근무는 너무 괴롭다.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우선 우리 회사는 사내 복지가 참 좋다. 그것이 재택근무에서는 역풍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사내 카페를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 갑갑하다. 캡슐 커피가 아무리 잘 나온다지만, 바리스타분께서 직접 타주시는 커피와는 느낌이 다르다. 밥 또한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공되는 사내 식당은 정말 최고다. 특히나 나 같은 독거인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집에서 즉석 밥으로 주섬주섬 챙겨 먹고 있자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탕비실 또한 마찬가지다. 가끔 우유나 두유, 혹은 감동란(!)이 생각날 때 빼먹는 건 나만의 사무실 활력소였다. 내 방 냉장고에 그득한 생수와 제로콜라, 우엉차 페트병은 활력소가 되진 않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난, 엉덩이보다는 발을 써서 일하게 되었다. 유난히 바쁜 날이면 따로 걷지 않아도 하루 걸음 수가 9000을 찍곤 한다. 논의할 내용이 있을 때 즉각적으로 몸을 움직여 짧은 시간 내에 논의를 마치고 진행하는 것이 현재 회사 스타일이자, 내 스타일이다. 집에서 그 스타일을 유지하려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평소에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 내 휴대전화는 재택근무시에만 이름값을 톡톡히 하곤 한다. 이걸 기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나마도 얼굴을 보고 소통하는 것이 아니니 시간도 좀 더 소요되는 느낌이 든다.


와중에 위협적인 것은,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난 지금 원룸에 살고 있다. 그 뜻은, 내 모든 가재도구가 방 하나에 있다는 것이다. 침대 끝에 있는 컴퓨터. 평소에는 취미 생활을 즐기는 데 사용하곤 한다. 그 취미 생활은 휴식과 궤를 같이한다. 딱히 아직은 분리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택근무가 시행되면서, 내 휴식 공간은 침해받기 시작했다. 첫 재택근무 일에는 부끄럽지만 씻지 않았다. 이게 재택근무지! 음악을 방 가득 틀어놓고 씻지도 않은 채 업무를 한다고 하니 신이 났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치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인 마냥, 목욕을 깨끗이 한다. 음악도 틀지 않는다. 어차피 통화해야 해서 금방 꺼야 한다. 그렇게 마음가짐을 다르게 해도 눈에 보이는 환경이 그렇지 않다 보니, 적응되지 않는다. 업무를 하다가도, 뒤를 돌아보면 침대가 있다. 옆에는 아까 억지로 욱여넣은 끼니의 흔적이 좌식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다.


특히나 퇴근 시간이 제일 문제다. 사무실로 출퇴근할 때에는, 퇴근길은 일종의 업무 정리 시간이었다. 퇴근길의 발걸음은 내가 그날의 업무를 어떻게 진행했는지를 보여주곤 한다. 그날의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는 발걸음이 미묘하게 느려진다. 그런 날은 괜히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들어가곤 한다. 나에게 퇴근길은 '이제 컴퓨터를 끄셔도 됩니다.'의 느낌이다. 그 메시지를 봐야만 내 컴퓨터를 끌 수 있다. 하지만! 재택근무는 그런 단계가 없다. 업무 종료하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리면 내 눈앞에 모니터가 보인다. 취미 생활을 위해 컴퓨터 의자에 앉아도 일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젠장. 퇴근했는데 퇴근하지 않았다.


이 시국이 마무리되는 것과 나에게 '업무용 방'이 따로 생기는 것 중 어떤 것이 먼저 올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이 시국이 마무리되는 것이 먼저긴 하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솔직히 '업무용 방'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나는 재택근무가 싫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 당신들과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부대끼면서, 그렇게 예전처럼 일하고 싶다. 내가 구시대적 인간이라고? 그래.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이런 부분에서는 트렌드를 쫓아가는 걸 포기하겠습니다. 부디 나를 사무실로 보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검사가 익숙해진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